어느 책중독자의 고백
톰 라비 지음, 김영선 옮김, 현태준 그림 / 돌베개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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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래 고백한다, 나는 책중독자다. 하지만, 굳이 톰 라비가 구분한 분류법에 의하면 장서광(bibliomania)이라기 보다는 애서가(bibliophilia)에 가깝지 않을까? 어쨌거나 모든 경제활동의 단위를 책값에 비유하고, 다른 비용에 우선해서 책을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 걸 보면 애서가와 장서광의 중간 정도에 어중간하게 서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보통 책에 대한 책은 잘 보지 않는 편이다. 나만의 독서를 하기에도 바쁜 데 다른 이가 책에 대해 쓴 글을 볼 틈이 어디 있나 그래. 이 얼치기 애서가/장서광은 꾸역꾸역 그렇게 책을 사댄다. 애서가와 장서광을 나누는 결정적인 기준이 되는 그 책을 읽었느냐는 질문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비슷한 증세의 책쟁이들과 항상 하는 말이 우리가 읽을 책이 없어서 책을 사냐는 자조적인 말이 있다. 그렇다, 우리가 책이 없어서 책을 사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책을 사서 누리는 즐거움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렇다고 마니아적 기질의 장서광처럼 초판본이나 희귀본에 대한 애정은 부족한 것 같다. 그러니 직접 책을 먹는다는 식서가 정도 되면 이건 중증이라고 불러야 할까? 우리의 동지 톰 라비는 익살스럽게 유사 이래 책중독자의 다양한 면모를 유감없이 동지들에게 전달한다. 특히, 18세기 프랑스 변호사 출신의 불라르의 책에 대한 욕심은 가히 환상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얼마나 책을 모았던지 그가 죽고 나서 시장에 풀린 책 때문에 한때 파리의 책값이 다 싸졌었다고 했던가.

할인판매를 하는 대형마트의 책코너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똑같은 찰스 디킨스의 전집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사들이고, 온라인 구매로 아낀 돈으로 다시 책을 사는 책중독자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서 마음이 마냥 푸근해졌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책을 펴드는 책중독자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서 흠칫흠칫 놀라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위안을 얻기도 했다. ‘이 세상에 나를 닮은 동지가 있군’하는 위로감 말이다.

톰 라비는 그런 위로뿐만 아니라 고수 사이에 통용되는 은근한 기술도 알려준다. 좀 있어 보이는 서가처럼 보이기 위해 가짜 나무책을 만들었던 선인들의 지혜는 물론이고,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책을 임기응변으로 지어내 제 자랑을 일삼는 책중독자를 골탕먹이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책중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발한 방법을 전수해준다. 책중독자를 위한 꼭 필요한 지침서라고 할까.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나 고대해 마지않던 책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을 때, 책중독자들이 누리는 열락의 즐거움을 톰 라비는 다양한 방법으로 진단한다. 심지어 자신의 책중독을 진단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도 은근슬쩍 제공한다, 멋지다! 대부분의 책중독자들이 그렇듯 부정의 단계를 피할 수가 없다. 어쩌면 솔직해야 할 책중독 테스트에서 결과를 예상해서 몇 개 정도는 슬쩍 피하는 센스를 발휘할지도 모르겠다.

책의 끄트머리에서 톰 라비는 언제부터인가 유사 이래 계속되어온 책의 존재를 위협하는 전자책을 소개한다. 책이 품고 있는 콘텐츠를 사랑하는 애서가에게는 희소식일지 모르겠지만, 책 고유의 향기마저 사랑하는 책중독자에게는 비보일지도 모르겠다. 전통 출판시장에서 하루가 다르게 조금씩 그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전자책의 도전은 거세다. 개인적으로 톰 라비의 말마따나 전자의 움직임으로 구성된 전자책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신속한 구매와 편리성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여전히 구식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작된 책이 마음에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두꺼운 책을 읽어가며 남은 분량을 가늠하는 즐거움을 어떻게 전자책에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진짜 책중독자가 느끼는 죄책감에 대해 톰 라비는 멋진 면죄부를 발행한다. 결국, 어떻든 간에 우리의 증세는 고칠 수가 없단다. 그러니 책을 사고 읽기 위해 경제활동을 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아낌없이 책을 사라는 것이 톰 라비식의 화끈한 처방전이다. 고칠 수 없으면 차라리 즐겨야 하는 걸까?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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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
체 게바라 지음, 김홍락 옮김 / 학고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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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에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최후를 다룬 글을 리더스다이제스트를 통해 읽었다. 보수적인 성향의 리더스다이제스트는 예상대로, 혁명수출을 위해 라틴아메리카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볼리비아에서 무장 게릴라 활동을 벌인 공산주의자 체 게바라의 약식재판도 없는 처형을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서술했다. 모든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고려한다면, 과연 어느 한 쪽의 이야기만으로 지난 세기 가장 완벽한 사람이라고 칭송받은 인물을 너무 단편적으로만 그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다년간 외교사절로 활동한 김홍락 볼리비아 대사의 세심하면서도 유려한 번역으로 만나게 된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는 어느 혁명가의 최후를 균형 잡힌 시선으로 보게 해주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다.

<볼리비아 일기>는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게릴라 전사 에르네스토 게바라가 1966년 11월부터 이듬해 10월 볼리비아 유로계곡 전투에서 볼리비아 정부군에 잡혀 처형되기 전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쿠바에서의 성공 후, 어떻게 보면 전 세계의 억압받는 모든 인민을 해방하겠다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호응하는 열혈 혁명전사로 거듭난 체는 아프리카 콩고를 거쳐 볼리비아를 다음 혁명의 전초기지로 결정한다.

쿠바에서의 게릴라 활동이 체의 생애 가장 빛나는 성공의 순간이었다면, 볼리비아에서의 그것은 역설적으로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육필로 쓴 볼리비아에서 일기에는 무장 게릴라 투쟁 성공에 대한 확신과 30대 후반 게릴라 전사의 신념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외부와의 연락 두절, 볼리비아 공산당과의 반목, 현지 농민 계급의 밀고 그리고 식량 부족으로 인한 끝없는 보급투쟁의 과정은 볼리비아에서 체의 실패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로 다가온다.

바티스타 독재정권 타도와 외세축출이라는 뚜렷한 목적으로 투쟁의 대오를 이뤘던 쿠바에서와는 달리, 나름대로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선출된 바리엔테스 정권의 토대는 체 게바라와 마닐라(쿠바의 암호명)의 예상과는 달리 강건했다. 게릴라 활동의 필수적인 민중의 지지와 지원도 거의 받을 수가 없었다. 볼리비아 공산당과의 헤게모니 다툼도 한몫했다. 설상가상으로 쿠바, 볼리비아, 페루 같이 다양한 국적으로 구성된 체의 게릴라 부대는 활동 초기부터 불화와 반목으로 지도자 체에게 걱정거리를 안겨준다.

그들이 주로 활동하던 리오그란데 강 유역의 정글의 기후와 지형에 적응하지 못한 게릴라 부대는 그 지역 농민의 길 안내에 의존해야 했고, 친정부적인 성향의 길라잡이들은 그들의 활동을 그대로 미국 군사고문단의 지원을 받는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전달했다. 식량이 떨어져 야생동물을 잡아먹으면서 게릴라 부대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고, 기강 해이와 부주의로 대원들이 희생되면서 이탈자도 속출했다. 한 때 정부군을 상대로 그야말로 신출귀몰하는 활약을 벌이던 체의 게릴라 부대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투쟁을 계속한다. 8월 말 바도 델 예소 전투의 패배와 호아킨 부대의 전멸로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다가오는 자신의 최후를 예감한다.

번역을 맡은 김홍락 대사는 최후의 유로계곡 전투와 라이게라에서의 처형으로 갑자기 끝난 체 게바라의 마지막 일기를 친절하게도 에필로그와 볼리비아 게릴라전에 참가했던 게릴라들의 약력으로 보충 설명해준다. 원래 에르네스토 게바라를 생포할 때만 하더라도, 처형계획이 없었지만 그에 동조하는 세력의 준동을 우려한 볼리비아 정부는 복잡한 재판 과정을 생략하고 그를 처형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체와 그의 동지들이 꿈꾸던 라틴아메리카 해방의 꿈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대신 라틴아메리아 곳곳에서 우익 군사독재로 인한 부정부패와 쿠데타의 악순환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자신에게 엄격했던 게릴라 지도자답게,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냉정하게 매일매일의 사건을 기록하고 월말에는 냉혹한 평가로 자신과 혁명과정을 비판했다. 동시에 피할 수 없었던 동지들의 희생 앞에서는 문학가를 능가하는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였음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특히, 쿠바와 콩고에서 사선을 넘으며 투쟁했던 카를로스 코예요(투마)와 엘리세오 레예스 로드리게스(롤란도)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게릴라 지도자가 아닌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체 게바라가 마지막을 맞았던 볼리비아의 라이게라와 리오그란데 유역은 이제 유명 관광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볼리비아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다 최후를 맞은 체 게바라의 후광이 여전히 낙후된 지역에 살고 이들에게 비추고 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21세기에 다시 읽는 한 시절을 풍미했지만, 실패한 게릴라 전사의 마지막 기록은 그래서 더 멜랑콜리한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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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상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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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던 제국주의 시절의 향수가 물씬 풍기는 발언의 주인공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읽었다. 이런저런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었지만, 또 <베니스의 상인>은 처음인 것 같다. 2004년에 발표된 알 파치노가 부자 유대인 상인 샤일록으로 열연한 영화 버전을 봤는데, 이제야 원작과 만나게 됐다.

16세기 말 셰익스피어가 발표한 <베니스의 상인>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전 세계에 상단을 파견해서 향료와 비단 사업을 벌이는 앤토니오에게 그의 절친 바싸니오가 벨몬트에 사는 아리따운 포오셔에게 청혼하기 위해 군자금으로 3,000 다가트를 융통해 달라고 하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당장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던 앤토니오는 자신의 신용을 걸고(요즘 식으로 하면 신용담보대출 정도가 되겠다) 천하의 수전노 유대인 샤일록에게 돈을 빌린다.

그런데 이 샤일록이라는 유대인이 건 계약위반 시 조건이 해괴하다. 앤토니오의 신체 부분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살 1파운드를 달라는 거다. 나름대로 사업에 자신이 있던 앤토니오에게 3,000 다가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그는 흔쾌히 이 조건을 수락한다. 하지만, 신화에 등장하는 금기가 모두 깨지게 되어 있듯 앤토니오의 계약 역시 위반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 프랑스와 영국 해협에서 그리고 트리폴리스와 세계 각국에서 베니스로 향하던 앤토니오의 선박들이 모두 침몰한다. 자, 이제 위기다.

한편, 두둑한 군자금을 얻은 바싸니오는 포오셔에게 구혼하고 수수께끼 같은 상자 뽑기 미션에 나선다. 금상자, 은상자 그리고 납상자 중에 포오셔의 초상화가 든 상자를 뽑는 것이다. 항상 이런 미션에게는 조건이 걸리기 마련인데, 상자를 뽑은 사람은 이후에 일체 상자 뽑기의 비밀에 대해 말하지 말 것과 이후 홀아비로 사는 약속을 해야 한단다. 거 참, 당대에 포오셔가 얼마나 대단한 신붓감인진 모르겠지만 가혹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샤일록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미션을 무사히 수행한 바싸니오는 포오셔의 사랑도 얻고, 이제 법정에 서게 된 앤토니오를 구하러 나선다.

셰익스피어는 악마의 탈을 쓴 유대인 샤일록이 증오와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법정에서 공개 살인을 하겠다고 칼날을 가는 장면까지 섬세하게 묘사한다. 고리대업을 통해 이윤(이자)을 얻는 행위를 극도로 경멸한 당시 시대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요즘처럼 금융업이 발달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장땡이라는 게 작금의 세태가 아니던가.

책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잉태된 반유대주의의 유서 깊은 증오의 흔적을 보는 것 같아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앤토니오는 물론이고, 그의 친구들 역시 거리낌 없이 샤일록을 모욕하고 저주한다. 셰익스피어가 창조해낸 살 1파운드를 요구하는 파렴치한 캐릭터 이상의 혐오가 중세 이래 유럽에 뿌리내린 반유대주의와 공명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이윤에 대한 서로 다른 시선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앤토니오와 그 친구들은 그렇게 얻은 이윤을 경멸하지만, 샤일록은 정당한 수익이라고 항변한다. 아직 근대적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은 베니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의 가치관 충돌일까. 당대에는 앤토니오가 승리했을진 모르겠지만, 현재라면 샤일록이 이겼을지도 모르겠다. 신체 포기각서가 횡행하는 마당에 그깟 살 한 덩이 쯤이야.

법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포오셔와 니리서는 자신들이 배우자에게 준 사랑의 증거인 반지를 교묘하게 얻어내 남자들의 맹세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조롱한다.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은 이야기의 작은 반전이라고나 할까. 깨지지 않으리라고 목숨을 걸고 한 사랑의 맹세는 하나같이 깨질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는 것이 신화가 보여주는 엄연한 사실을 그들은 미처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앤토니오와 바싸니오의 묘한 우정도 관전 포인트다.

책을 읽으면서 란슬럿트 고보와 아버지 샤일록을 배신하고 로렌조와 사랑의 도피를 택한 제시커의 등장이 궁금해졌다. 후자야 샤일록의 비극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이해할 수 있지만, 간간이 등장하는 어릿광대 란슬럿트의 역할은 무엇일까? 희극으로 무대상연을 전제로 쓰인 만큼 관객의 웃음을 위한 장치였을까? 이런 모호함이야말로 셰익스피어 문학이 오늘날까지도 많은 학자의 연구 대상이 된 이유가 아닐까 추론해 본다.

위키피디아로 <베니스의 상인>을 검색해 보니 희비극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는데 그런 분류가 이해가 간다. 희극과 비극을 한 드라마 속에서 저글러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대가의 실력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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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더 돔 1 밀리언셀러 클럽 111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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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에 영화 <미저리>를 봤다. 주인공 캐시 베이츠의 열연에 반했던 작품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이라고 들었다. 그 후에도 <쇼생크 탈출>로 다시 스티븐 킹과 만났지만 정작 그의 작품을 책으로 접한 건 이번 <언더 더 돔>이 처음이었다.

어느 작가보다도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을 사랑하는 스티븐 킹은 자신의 고향 메인 주의 어느 시골 마을을 대작 <언더 더 돔>(2009)의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한다. 인구 천여 명 남짓한 체스터스밀 마을 지도까지 제공해주는 출판사의 섬세한 배려가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지도 뒤에는 많은 주인공에 대한 깔끔한 정리가 마음에 들었다. 하긴 워낙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많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정말 눈에 띄는 건 “눈여겨볼 견공들” 목록이다. 자, 이제 이 대작과 만날 준비가 되었으면 스티븐 킹 작품 중에서 <스탠드>(1990)와 <그것>(1986)에 이어 세 번째로 길다는 <언더 더 돔>에 도전해 보자.

소설의 힌트는 표지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체스터스밀 마을을 둘러싼 투명한 막, 그들이 부르는 돔으로 마을은 10월의 어느 날 갑자기 외부와 격리된다. 스티븐 킹은 외부와의 격리를 강조하기 위해, 간발의 차이로 마을을 탈출하는 데 실패한 주인공 데일 바버라(바비)와 불운하게도 투명 차단막이 내려오는 찰나에 그만 두 동강이 난 마못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돔이 생기자마자 연습비행을 하던 소형비행기가 돔에 부딪히고, 엄청난 속도로 마을 경계로 달려가던 트럭도 그야말로 ‘박살’이 난다.

“호러” 장르로 구분된 <언더 더 돔>은 대가의 역작답게 다양한 주인공이 엮어내는 여러 갈래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마을의 실제적인 지배자인 마을의장단의 부의장 빅 짐 레니의 아들 주니어 레니와 술집에서의 사소한 시비로 결국 싸움까지 다다른 요리사 바비는 조용하게 마을을 떠나려고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돔 때문에 마을에 갇히게 된다. 마을 의장인 앤디 샌더스와 사고로 죽은 경찰서장 하위 퍼킨스를 대신해서 서장직을 맡게 된 피터 랜돌프는 마을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경찰력 확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아들 주니어 레니와 그의 건달 패거리를 임시직 경관으로 임명한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빅 짐의 추악한 음모가 밝혀지는 가운데,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전통적 구조를 통해 위기 상황에 빠진 인간 군상의 실제 모습을 작가는 냉정하게 그려낸다.

돔이 언제 사라질 건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가운데,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제외하고는 외부와 차단된 체스터스밀에서 연료(프로판가스)와 식량의 확보가 우선이라고 바비는 예언한다. 그의 예언은 나중에 푸드시티 폭동 사건으로 현실화된다. 빅 짐이 폭동을 선동하고, 무질서와 폭력을 제압하면서도 자신의 권력을 장악해 가는 과정은 나치 지도자 히틀러가 독일국회 의사당 방화사건을 계기로 권력을 쟁취하는 그것과 너무나 유사했다. 빅 짐이 채용한 얼치기 경관들은 1930년대 독일에서 폭력을 행사하던 나치 돌격대(SA)를 연상시킨다. 몇 세대 전 괴벨스의 선동정치를 베낀 것 같은 빅 짐의 행태에 대한 작가의 묘사가 놀라울 뿐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선량한 이미지의 가면을 쓰고, 살인도 불사하는 빅 짐과 주니어 레니 부자의 위선적인 모습은 갈수록 추악해지는 체스터스밀 마을의 이전투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마을의 공권력을 주도적으로 행사하면서, 연방대통령이 임명한 계엄 사령관 바비를 증오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에게 살인누명까지도 씌워 사적인 복수의 제물로 삼으려고 한다. 아무리 비상상황이라고 하지만, 최소한의 법절차도 무시한 채 “모두의 안녕을 위”한다는 말로 공공연한 공갈과 협박 그리고 폭력을 무고한 사람들에게 휘두르는 장면을 통해 스티븐 킹은 독자들의 분노 게이지를 끌어 올린다. 익히 알려진 대로 민주당 지지자인 작가의 양치기 소년 부시 정권에 대한 조소와 힐난이 소설 곳곳에서 눈에 띈다.

미국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작가의 애정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4대째 마을 신문사를 운영하는 줄리아 셤웨이는 보수적 공화당 지지자이면서도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바비 편에 서게 된다. 그녀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슬로건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가짜 보수주의자 빅 짐과 대척점에 선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 합리적 보수의 진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잦은 총기 사고 때문에 뜨거운 감자처럼 언급되는 수정헌법 2조의 “무기 휴대의 권리”가 의미하는 잘못된 정부 혹은 정권에 대한 저항은 마을의 무소불위한 독재자로 군림하기 시작한 빅 짐 레니에 대한 마을 주민의 자각과 그에 따른 반발로 형상화된다.

한편, 소설을 읽을수록 과연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돔”이 과연 어떻게 처리가 될지 궁금해진다. 바비는 조 매클러치, 노리 캘버트 그리고 베니 드레이크라는 마을 꼬마 삼총사에게 방사능 수치를 측정할 수 있는 가이거 계수기를 들려서 돔의 정체를 파악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긴다. 마을 어른들이 대형 마트에서 물건을 약탈하느라 이전투구를 벌이는 동안, 정말 중요한 일은 아이들이 찾아 나선다는 설정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2권을 다 읽기 전까지 이 책이 3권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만약 세 번째 권도 한 500쪽을 너끈하게 넘긴다면 정말 한 1,500쪽 소설이라는 건가? 엄청난 분량에도 책 읽는 재미는 가히 최고였다. 어서 빨리 3권과 만나고 싶다.

[뱀다리]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과 지명의 교정에 좀 더 신경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헤스켈 선생과 해스켈 선생은 다른 사람이 아닐 테고, 메사추세츠와 매사추세츠는 다른 곳이 아닐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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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즈 예게른 -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15-1916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파올로 코시 지음, 이현경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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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홍구 교수님의 <역사란 무엇인가> 강의를 들었다. 한 교수님은 강의에서 역사가의 특정 역사에 대한 취사선택 그 자체가 역사가 만들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말씀하셨다. 같은 사건이라도 어느 시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이탈리아 출신의 만화 작가 파올로 코시가 이 책 <메즈 예게른>에서 다룬 아르메니아의 슬픈 역사 그런 게 아닐까? 역사에서 과연 객관성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이미 파올로 코시는 아르메니아의 처지에서 대학살 사건을 피력한 게 아닐까 싶다.

히틀러와 나치의 유대인 절멸 계획이었던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서구 문학과 언론에서 꾸준하게 문제를 제기하면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주제가 되었다. 하지만 지난 세기 최초의 대학살이었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1915-1916)은 어떨까? 독일-오스트리아 동맹국의 일원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던 터키가 전쟁 중에 저지른 대학살의 비참한 실상을 파올로 코시는 만화로 순화해서 전달해준다. 당시 터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의 잔학행위를 숨기려고 했지만, 끔찍한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증언과 양심적 서구인들의 노력으로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통해 인류사에 오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무슬림 국가 터키의 기독교 아르메니아인 탄압의 역사는 지난 세기에 처음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술탄 압둘 하미드 2세가 통치하던 19세기 후반에도 계속해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학살이 있었다. 청년 투르크당의 개혁으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탄압이 중지되는가 싶었지만 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의 광기 속에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조직적 학살이 재개됐다. <메즈 예게른>에서는 전쟁에 아르메니아 자원병으로 참가한 아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과 소나가 사막을 가로지르는 죽음의 행진에서 생존한 점을 극화화해서 당시의 불편한 진실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당시 터키를 실제로 지배하고 있던 국방장관 엔베르 파샤, 해군성장관 아흐메드 제말 파샤 그리고 내무장관 메흐메트 탈라트 파샤 3인방은 <아르메니아인 문제 해결>이라는 마치 나치 독일의 수뇌들이 모여서 합의한 <유대인 최종 해결>을 연상시키는 아르메니아인 조직 학살을 주도한다. 이들은 아르메니아인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전멸시키겠다는 엄청난 계획을 용의주도하게 집행했다. 파올로 코시는 당시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잊고 싶은 과거를 성공적으로 재현해낸다.

작가는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사에서 지울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독일 출신의 양심적 군인인 베르너 소위와 요하네스 렙시우스 같은 이들이 아르메니아인을 구하려는 노력도 빠뜨리지 않는다. 독일은 전후에도 계속해서 그들의 조상이 저지른 홀로코스트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했지만, 터키는 아르메니아인 학살사건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메즈 예게른>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을 국가모독죄로 기소한 것은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파올로 코시 작가가 선택한 주제인 아르메니아인 학살사건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과거와 화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이 좋을까? 그런 아픔을 가지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의 공존이 과연 가능할까? 화해와 공존이 피해자에 대한 일방적 강요는 아닐까 하는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어쩌면 이렇게 짧은 책으로 모든 것에 대한 정답을 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책의 소개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국내에서 아르메니아 학살사건을 다룬 첫 번째 책이라는 점에서 <메즈 예게른>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메즈 예게른>을 심도 있게 다룬 책의 출간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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