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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상인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영국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던 제국주의 시절의 향수가 물씬 풍기는 발언의 주인공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읽었다. 이런저런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었지만, 또 <베니스의 상인>은 처음인 것 같다. 2004년에 발표된 알 파치노가 부자 유대인 상인 샤일록으로 열연한 영화 버전을 봤는데, 이제야 원작과 만나게 됐다.
16세기 말 셰익스피어가 발표한 <베니스의 상인>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전 세계에 상단을 파견해서 향료와 비단 사업을 벌이는 앤토니오에게 그의 절친 바싸니오가 벨몬트에 사는 아리따운 포오셔에게 청혼하기 위해 군자금으로 3,000 다가트를 융통해 달라고 하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당장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던 앤토니오는 자신의 신용을 걸고(요즘 식으로 하면 신용담보대출 정도가 되겠다) 천하의 수전노 유대인 샤일록에게 돈을 빌린다.
그런데 이 샤일록이라는 유대인이 건 계약위반 시 조건이 해괴하다. 앤토니오의 신체 부분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살 1파운드를 달라는 거다. 나름대로 사업에 자신이 있던 앤토니오에게 3,000 다가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그는 흔쾌히 이 조건을 수락한다. 하지만, 신화에 등장하는 금기가 모두 깨지게 되어 있듯 앤토니오의 계약 역시 위반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 프랑스와 영국 해협에서 그리고 트리폴리스와 세계 각국에서 베니스로 향하던 앤토니오의 선박들이 모두 침몰한다. 자, 이제 위기다.
한편, 두둑한 군자금을 얻은 바싸니오는 포오셔에게 구혼하고 수수께끼 같은 상자 뽑기 미션에 나선다. 금상자, 은상자 그리고 납상자 중에 포오셔의 초상화가 든 상자를 뽑는 것이다. 항상 이런 미션에게는 조건이 걸리기 마련인데, 상자를 뽑은 사람은 이후에 일체 상자 뽑기의 비밀에 대해 말하지 말 것과 이후 홀아비로 사는 약속을 해야 한단다. 거 참, 당대에 포오셔가 얼마나 대단한 신붓감인진 모르겠지만 가혹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샤일록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미션을 무사히 수행한 바싸니오는 포오셔의 사랑도 얻고, 이제 법정에 서게 된 앤토니오를 구하러 나선다.
셰익스피어는 악마의 탈을 쓴 유대인 샤일록이 증오와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법정에서 공개 살인을 하겠다고 칼날을 가는 장면까지 섬세하게 묘사한다. 고리대업을 통해 이윤(이자)을 얻는 행위를 극도로 경멸한 당시 시대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요즘처럼 금융업이 발달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장땡이라는 게 작금의 세태가 아니던가.
책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잉태된 반유대주의의 유서 깊은 증오의 흔적을 보는 것 같아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앤토니오는 물론이고, 그의 친구들 역시 거리낌 없이 샤일록을 모욕하고 저주한다. 셰익스피어가 창조해낸 살 1파운드를 요구하는 파렴치한 캐릭터 이상의 혐오가 중세 이래 유럽에 뿌리내린 반유대주의와 공명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이윤에 대한 서로 다른 시선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앤토니오와 그 친구들은 그렇게 얻은 이윤을 경멸하지만, 샤일록은 정당한 수익이라고 항변한다. 아직 근대적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은 베니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의 가치관 충돌일까. 당대에는 앤토니오가 승리했을진 모르겠지만, 현재라면 샤일록이 이겼을지도 모르겠다. 신체 포기각서가 횡행하는 마당에 그깟 살 한 덩이 쯤이야.
법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포오셔와 니리서는 자신들이 배우자에게 준 사랑의 증거인 반지를 교묘하게 얻어내 남자들의 맹세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조롱한다.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은 이야기의 작은 반전이라고나 할까. 깨지지 않으리라고 목숨을 걸고 한 사랑의 맹세는 하나같이 깨질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는 것이 신화가 보여주는 엄연한 사실을 그들은 미처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앤토니오와 바싸니오의 묘한 우정도 관전 포인트다.
책을 읽으면서 란슬럿트 고보와 아버지 샤일록을 배신하고 로렌조와 사랑의 도피를 택한 제시커의 등장이 궁금해졌다. 후자야 샤일록의 비극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이해할 수 있지만, 간간이 등장하는 어릿광대 란슬럿트의 역할은 무엇일까? 희극으로 무대상연을 전제로 쓰인 만큼 관객의 웃음을 위한 장치였을까? 이런 모호함이야말로 셰익스피어 문학이 오늘날까지도 많은 학자의 연구 대상이 된 이유가 아닐까 추론해 본다.
위키피디아로 <베니스의 상인>을 검색해 보니 희비극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는데 그런 분류가 이해가 간다. 희극과 비극을 한 드라마 속에서 저글러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대가의 실력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