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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중독자의 고백
톰 라비 지음, 김영선 옮김, 현태준 그림 / 돌베개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그래 고백한다, 나는 책중독자다. 하지만, 굳이 톰 라비가 구분한 분류법에 의하면 장서광(bibliomania)이라기 보다는 애서가(bibliophilia)에 가깝지 않을까? 어쨌거나 모든 경제활동의 단위를 책값에 비유하고, 다른 비용에 우선해서 책을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 걸 보면 애서가와 장서광의 중간 정도에 어중간하게 서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보통 책에 대한 책은 잘 보지 않는 편이다. 나만의 독서를 하기에도 바쁜 데 다른 이가 책에 대해 쓴 글을 볼 틈이 어디 있나 그래. 이 얼치기 애서가/장서광은 꾸역꾸역 그렇게 책을 사댄다. 애서가와 장서광을 나누는 결정적인 기준이 되는 그 책을 읽었느냐는 질문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비슷한 증세의 책쟁이들과 항상 하는 말이 우리가 읽을 책이 없어서 책을 사냐는 자조적인 말이 있다. 그렇다, 우리가 책이 없어서 책을 사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책을 사서 누리는 즐거움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렇다고 마니아적 기질의 장서광처럼 초판본이나 희귀본에 대한 애정은 부족한 것 같다. 그러니 직접 책을 먹는다는 식서가 정도 되면 이건 중증이라고 불러야 할까? 우리의 동지 톰 라비는 익살스럽게 유사 이래 책중독자의 다양한 면모를 유감없이 동지들에게 전달한다. 특히, 18세기 프랑스 변호사 출신의 불라르의 책에 대한 욕심은 가히 환상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얼마나 책을 모았던지 그가 죽고 나서 시장에 풀린 책 때문에 한때 파리의 책값이 다 싸졌었다고 했던가.
할인판매를 하는 대형마트의 책코너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똑같은 찰스 디킨스의 전집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사들이고, 온라인 구매로 아낀 돈으로 다시 책을 사는 책중독자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서 마음이 마냥 푸근해졌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책을 펴드는 책중독자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서 흠칫흠칫 놀라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위안을 얻기도 했다. ‘이 세상에 나를 닮은 동지가 있군’하는 위로감 말이다.
톰 라비는 그런 위로뿐만 아니라 고수 사이에 통용되는 은근한 기술도 알려준다. 좀 있어 보이는 서가처럼 보이기 위해 가짜 나무책을 만들었던 선인들의 지혜는 물론이고,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책을 임기응변으로 지어내 제 자랑을 일삼는 책중독자를 골탕먹이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책중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발한 방법을 전수해준다. 책중독자를 위한 꼭 필요한 지침서라고 할까.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나 고대해 마지않던 책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을 때, 책중독자들이 누리는 열락의 즐거움을 톰 라비는 다양한 방법으로 진단한다. 심지어 자신의 책중독을 진단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도 은근슬쩍 제공한다, 멋지다! 대부분의 책중독자들이 그렇듯 부정의 단계를 피할 수가 없다. 어쩌면 솔직해야 할 책중독 테스트에서 결과를 예상해서 몇 개 정도는 슬쩍 피하는 센스를 발휘할지도 모르겠다.
책의 끄트머리에서 톰 라비는 언제부터인가 유사 이래 계속되어온 책의 존재를 위협하는 전자책을 소개한다. 책이 품고 있는 콘텐츠를 사랑하는 애서가에게는 희소식일지 모르겠지만, 책 고유의 향기마저 사랑하는 책중독자에게는 비보일지도 모르겠다. 전통 출판시장에서 하루가 다르게 조금씩 그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전자책의 도전은 거세다. 개인적으로 톰 라비의 말마따나 전자의 움직임으로 구성된 전자책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신속한 구매와 편리성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여전히 구식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작된 책이 마음에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두꺼운 책을 읽어가며 남은 분량을 가늠하는 즐거움을 어떻게 전자책에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진짜 책중독자가 느끼는 죄책감에 대해 톰 라비는 멋진 면죄부를 발행한다. 결국, 어떻든 간에 우리의 증세는 고칠 수가 없단다. 그러니 책을 사고 읽기 위해 경제활동을 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아낌없이 책을 사라는 것이 톰 라비식의 화끈한 처방전이다. 고칠 수 없으면 차라리 즐겨야 하는 걸까? 브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