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베스트셀러의 유혹? 잘 모르겠다. 그냥 이 책이 읽고 싶었다. 언젠가 들은 문학동네 팟캐스트 채널1 문학이야기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예능 알쓸신잡 출연으로 수년 만에 발표한 소설집도 순항 중이고, 이제 곧 영화도 개봉예정이라고 하니 작가에게는 겹경사다.

 

책을 읽기 전에 팟캐스트로 책의 저간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입수해서, 사실 책읽기는 어쩌면 내가 들은 것의 점검 정도였을 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의도와 그리고 날카로운 예봉의 평론가의 포인트를 듣고 나니 책읽기의 재미가 배가 된다. 저자의 우려대로, 비슷한 제목인 아멜리에 노통브의 <살인자의 건강법>이 연상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150쪽 남짓의 경장편인 이 소설의 줄거리는 은퇴한 살인자가 마지막 살인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왜 주인공 김병수는 25년간 그만 둔 살인을 다시 결심하는 걸까? 은퇴를 번복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대두된 심각한 문제 하나가 있다. 그는 지금 시간과의 싸움에서 지고 있다. 현대적 병명으로 치환하자면,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말이다.

 

이미 이 지점에서 책은 충분히 독자로 하여금 흥미로움과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전직 수의사인 이 연쇄살인범은 아마추어 시인이자, 고전읽기를 즐기는 문인이다. 이미 십대에 폭력가장인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은퇴시켰고, 그것을 시발로 해서 킬러의 길에 들어섰다. 그가 주로 활동하던 시대인 1960~70년대는 체계적인 과학수사 따위는 없었고, 사로잡히지 않고 마음대로 무대를 휘저을 수가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보다 매혹적인 것이 살인이었노라고 기억을 잃어가는 킬러는 담담하게 때로는 냉혹하게 기술한다.

 

작가는 초반부터 대놓고 은퇴한 살인자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치매환자라고 선포하지만, 독자들은 작가가 놓은 교묘한 덫에 바로 걸려 버린다.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오락가락하는 주인공의 정신에 대해 독자는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종잡을 수가 없게 된다. 이런 순간의 착란이야말로 작가가 야심차게 준비한 반전의 복선이 아니었을까. 그 어느 때보다 느리게, 그야말로 김병수가 잃어가는 기억처럼 한땀한땀 써낸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은 순수한 악의 본질을 관통한다.

 

인간이란 존재가 결코 싸워 이길 수 없는 존재인 불변의 크로노스, ‘시간’이야말로 이 소설의 중심이다. 주인공 김병수는 그리스 고전에 등장하는 아버지를 죽이고 그 사실을 잊어버린 오이디푸스를 비웃으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묻는다. 그에게 영화까지 만들어진 ‘살인의 추억’은 어쩌면 자신의 존재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사방에서 조여 들어오는 시간의 압박에 맞서 기록하고, 심지어 녹음까지 하며 필사적으로 맞서지만 한 때 무시무시했던 연쇄살인범의 승부는 이미 갈려있다. 다만 타이밍의 문제다. 그가 남긴 기록조차도 온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독자는 무시로 간과한다. 실제 생활에서라면 어림도 없겠지만 이 역시 문학이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어쩌면 이 점이야말로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는 재미일 것이다.

 

아직까지 김영하 작가의 다른 소설을 충분히 접해 보지 못해, 비교평가가 어렵지만 전작들에 비해 유머가 늘었다는 작가의 말대로 이 노련한 살인자는 교양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유머도 갖췄다. 일본 방문길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는 공항직원의 질문에 그는 당당하게 “killing people"이라고 대답하고, 질문자는 ”healing people"이라고 잘못 알아듣는다. 촌철의 유머가 빛나는 장면이다. 시를 가르치는 문화센터 강사도 시원찮으면 은퇴시켜 버리겠다는 그의 독백이 농담처럼 들리지만은 않는다. 전자가 밝은 차원의 유머라면, 후자는 블랙유머 쯤 되겠다.

 

개인적으로 살인자 김병수가 살인을 그만 두게 된 계기가 마지막 살인 후, 당한 교통사고 때문이라고 했는데 소설에서 그 뒤의 삶에 대한 설명부족이 좀 아쉬웠다. 살인자는 그 뒤에 어떻게 먹고사니즘을 해결했지? 소설을 보니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어 보이는데, 궁금하다. 그리고 팟캐스트에서 신형철 평론가가 역사적 특수화라는 점으로, 한국화된 시리얼 킬러의 원형을 제시했다고 하는데 좀 더 그 부분에 대해 심도 있게 다뤘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의 정의를 행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천조국의 시리얼 킬러 덱스터와 김병수의 차이점은 무얼까. 그 누구도 그들에게 그럴 권리를 주지 않았지만, 체포와 처벌을 아랑곳하지 않고 목표물을 제거하는 냉혹한 시리얼 킬러가 어느새 문학에서 하나의 클리셰이(cliche)라는 전당의 주인이 된 건 아닐까.

 

 

기억을 잃어가는 이에게 두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는 이미 물 건너갔고, 지금인 현재도 같은 운명이다. 그에게는 역설적으로 미래기억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미래기억 역시 소멸을 전제로 그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그렇게 존재의 소멸을 모른 채 혹은 외면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작가가 던지는 짓궂은 농담이다.

 

* 다음 달에 동명의 영화가 개봉예정이라고 한다. 김병수 역은 연기라면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설경구가, 오달수와 김남길가 조연을 그리고 걸그룹 AOA 출신 설현이 출연한다고 한다. 소설은 경장편인데 영화는 두시간이라니, 아마 디테일이 많이 추가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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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08-08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읽은 기억이 나는데 내용은 가물가물 하네요.곧 영화로 나온다는데 주연이 설 씨라서 좀 망설여지네요. 오랜만에 떠올려보네요. 더운 날씨 건강 잘 챙기세요.

레삭매냐 2017-08-08 13:21   좋아요 0 | URL
그렇지 않아도
영화 트레일러 덧글을 보니 흥행이 될지
궁금해 하는 글들이 있더군요.

쇼코 2017-08-08 12: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영화가 개봉한다고 해서 책을 읽어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레삭매냐님 글 보니 소설이 더 궁금하네요. 레삭매냐님은 팟캐스트를 듣고 책을 더 재밌게 읽었다고 하셨는데 저는 레삭매냐님 글 덕에 소설을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을.것 같습니다^^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레삭매냐 2017-08-08 13:22   좋아요 1 | URL
개인적으로 <내 머릿속의 지우개> 스크린
플레이 작업도 한 적이 있다는 김영하
작가가 직접 각색 작업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2017-08-08 1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08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