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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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부지런을 떨어서 현대 영문학을 대표하는 영국 출신 작가 이언 매큐언의 <칠드런 액트>를 다 읽었다. 사실 그의 책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몇 개 소장하고만 있었다, 물론 읽지는 않고. 그중에서 가장 최근에 나온 <칠드런 액트>는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서 빌리기도 했지만 역시나 읽지 않고 반납한 기억이다. 이번에 신간 <넛셸>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지난 금요일날 냉큼 서점에 달려가서 <칠드런 액트>를 사왔고 주말 동안 다 읽을 수 있었다.

 

디테일에 강한 작가라고 하는데 책을 읽다 보니 충분히 그런 점들을 느낄 수가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올해 59세의 가족법 전문가로 고등법원 가사부에서 맹활약 중인 35년 경력의 피오나 메이 판사다. 그녀가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법원에서 다뤄야 할 다양한 형태의 쟁송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겠다고 선언한 역사학 교수 남편 잭의 개방결혼에 가까운 공식적 외도선언이다. 내세가 있지 않을 거라며, 죽기 전에 불타는 사랑 한 번 해보겠다는 남편의 폭탄선언에 피오나 판사는 그야말로 멘붕에 빠질 지경이다. 남편이 외치는 사랑타령의 본질은 성행위, 다시 말해 섹스다. 고작 섹스 때문에 조강지처를 버리고 자신보다 훨씬 어린 여자를 찾아 나서겠다니. 바로 이 지점에서 이언 매큐언 선생은 사랑에서 시작해서 공격적 혐오로 끝난 그 무엇의 실체(결혼제도)에 그렇게 문학적 도전장을 날린다. 커리어 여성으로 일에 전념하다 보니 아이를 가질 기회도 없었고, 무엇보다 노년을 앞둔 자신의 여성으로서 매력없음을 자각하게 된 사실이 주인공에게는 가장 뼈아프지 않았을까.

 

가사법원에서 정말 다양한 이혼 소송을 체험한 그녀에게 닥친 시련은 곧 이어질 소설의 핵심과제와 기묘하게 중첩된다. 실제 사건 판결문을 읽고, 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이언 매큐언의 말대로 작가는 처음부터 치밀한 구성을 전개한다. 주인공 판사에게 닥친 가정 위기는 곧 누구를 살리고 죽이느냐라는 고대 솔로몬왕의 재판 같은 샴 쌍둥이 이슈로 전이된다. 작가는 마치 소설의 서두에서 영국 관습법체계에 문외한인 독자를 위해 배려하는 차원에서 친절한 설명을 빠뜨리지 않는다. 기존의 판례를 중시하는 피오나 판사의 명쾌하고 논리적인 법조문 설명에 독자는 자연스레 동화된다.


 



자, 이제 이번 소설에서 정말 다루게 될 진짜 이슈에 해당하는 관문을 열어 보자. 애덤 헨리, 이제 만 18세 성인을 고작 3달 앞둔 상황에서 법적으로 아동에 해당하는 청소년 애덤이 덜컥 백혈병에 걸려 버렸다. 수혈을 해서 치료를 하게 되면 완치의 가능성이 높다는 병원 측의 주장에 반해 종교적 이유 때문에 애덤의 보호자인 부모와 본인은 수혈치료를 거부한다. 이런 방식으로 작가는 도덕, 법 그리고 의학이라는 트라이앵글에 독자를 가두어 버린다. 물론 독자에게 해결책은 없다, 다만 작가가 인도하는 대로 장님처럼 따라갈 뿐.

 

애덤의 부모는 독실한 여호와의 증인으로 피는 하나님에게 받은 신성한 것이며,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며 수혈치료를 거부한다. 아마도 그런 부모와 장로 그리고 다수 회중의 영향 탓에 애덤 역시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 수혈을 원치 않는다고 한다. 가정이 부서지고 와중에서도, 법 전문가 피오나는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사회복지사의 증언만으로도 충분한 판단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애덤 헨리를 직접 만나 판단하겠다고 선언한다. 논란의 중심에는 어떤 경우에도 “아동의 복지”를 최우선해야 한다는 칠드런 액트가 자리하고 있다. 합리적인 피오나 판사가 어떤 판결을 내릴지 짐작이 간다.

 


소년이 입원한 병원에서 그를 만난 피오나 판사는 애덤이 훨씬 더 다루기 힘든 존재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챈다. 병실에서 피오나와 애덤의 나누는 대화야말로 소설 <칠드런 액트>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언 매큐언 선생은 자신의 장기인 화려하면서도 균형 잡힌 디테일을 최대한으로 구사한다. 애덤은 피오나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총명하고, 성숙한 사고의 소유자였으며, 배움과 감수성에서도 일가견을 보여주는 그런 소년이었다. 종교적 교리 논쟁에서도 다년간 법정에서 경력을 쌓은 베테랑 판사에게 뒤지지 않는, 어쩌면 감정적으로 우세한 입장에서 멋진 대화를 이끌어 간다. 아마 이 소설이 영화화된다면, 이 부분이 어떤 식으로 영화화될지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지경이었다. 길지 않은 대화를 마치고 법정으로 돌아온 피오나 판사는 강제 수혈로 소년의 생명을 구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소설이 모두가 그렇게 행복했더라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을까? 어떤 획기적인 반전을 예상한 독자들의 기대를 이언 매큐언 선생은 저버리지 않는다. 남편 잭의 또다른 사랑을 찾아나선 가출과 애덤 헨리의 생명구하기 재판이라는 투트랙 가운데 후자가 먼저 매듭을 지은 것처럼 보이자, 집나간 남편도 새로운 애인에게 바람이라도 맞았는지 꼬리를 내리고 집으로 귀환한다. 그동안 성취한 것들을 잃고 싶지 않았던 노부부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고, 상처를 보듬기 시작한다. 아, 부부관계 역시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던 걸까.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부르주아지 가정의 한계를 엿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잭의 사면을 위해 피오나가 제안한 식사 자리에서 소리 없이 치르는 전쟁 그리고 동료 마크 버너와 함께 한 아마추어 콘서트에 앞서 비극적인 소식을 접하고 감정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장면 등은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가히 최고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도덕적 딜레마, 종교, 가족법 그리고 의학에 이르는 다양한 소재들을 가지고 황홀한 맛의 문학적 비빔밥을 창조한 이언 매큐언 선생에게 경의를 보내고 싶다. 새로 만난 이언 매큐언 선생의 작품은 내게는 너무나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신간 <넛셸>에서도 못지않은 탄탄한 구성과 고전과 영화에 대한 재해석 그리고 디테일 최강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하는데 기대가 크다. 뒤늦게 이언 매큐언 선생의 팬이 되어 하나씩 그의 전작들을 섭렵해 나갈 계획이다. 오래 전에 입수해서 고이 모셔 두었던 <이노센트>는 바로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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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7-05-22 1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언 매큐언 월드에 발을 들이신 건 완전 환영합니다. ㅎㅎ
신간 나오기 전에 <이노센트>도 다 읽으실 것 같은데요. ^^

레삭매냐 2017-05-22 14:05   좋아요 1 | URL
<칠드런 액트> 너무 재밌었어요.
<이노센트> 바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문동 이벵으로
받아 두었었거든요.

갠적으로 <토요일>이 질로 땡기는데 아직 구하지
못해서 아쉽네요 ~

<넛셸> 빠이팅!!!

대장물방울 2017-07-26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크, 저도 집에 모셔두고만 있었는데 이제 읽어봐야겠군요!

레삭매냐 2017-07-26 11:32   좋아요 0 | URL
강추합니다.
이번에 영화화된다고 하니 그전에 미리
읽어 보심이 어떨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