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안석, 황하를 거스른 개혁가
미우라 쿠니오 지음, 이승연 옮김 / 책세상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자고로 개혁가들은 민중에게 환영 받지 못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불변의 사실이다. 우리는 지난 엄혹한 겨울 촛불혁명으로 그동안 누적되어온 적폐 처단의 단초를 만들어냈다. 이제 시작이다. 수구 기득권 계층의 저항은 그들이 쌓아온 불평등에 기반한 사회구조 만큼이나 강고하고, 그들의 나팔수 역할을 자처하는 보수언론은 촛불대선을 앞두고 언론조작에 여념이 없다. 우리는 지금 현상유지냐 아니면 새로운 미래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주말부터 읽은 미우라 쿠니오 저자의 <왕안석, 황하를 거스른 개혁가>, 일본 역사가가 저술한 희대의 개혁가 왕안석 평전이 주는 교훈이 기대이상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북송 시대에 등장한 왕안석은 22세 청년등과에 성공한 수재였다. 당시 과거선발 제도에서 4등을 차지해서 관리의 길을 걷게 된다. 강서성 무주 임천 출신인 개보 왕안석은 훗날 구법당의 영수이자 이데올로그로 자신과 영원한 맞수가 되는 북방 호족 출신의 사마광과 달리 신진 사대부 출신이었다. 건국 이래 한 세기 정도 흐른 시점에서 송나라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지각 있는 사대부들은 이대로는 안된다는 사실을 공유하고 있었다. 당시 송나라는 북방 이민족인 거란의 나라 요나라와 서쪽 당항족의 서하로부터 심각한 군사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문치주의를 강조하던 건국 이래 이념 덕분에, 송나라의 군사력은 형편없었다. 군사력으로 이민족을 제압할 수 없었던 송나라는 세폐라는 물질적 방식으로 이민족의 침입을 무마해 오고 있었다. 물론, 중앙정부가 요와 서하에게 제공하던 세폐는 전적으로 송제국의 인민들에게 부과되었다. 어느 역사서에서는 송의 경제력이 압도적이어서 이민족에게 제공하던 세폐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해마다 수만량의 은자와 수십만 필의 비단 제공이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었던 건 사실로 추정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미우라 쿠니오 저자는 당송팔대가의 한 명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문재를 지닌 개혁가 왕안석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한다. 특별한 스승을 두지 않고 독학으로 학문을 깨우친 산림의 준재 왕안석은 민생 안정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불세출의 유학자이자 상고주의자였던 왕안석은 고대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요순시대의 재현이야말로 군주와 군주를 보필하는 관리들의 지상과제로 간주했다. 중국 사회를 지배한 이데올로기는 유학이었지만, 실제 국가경영에 있어 법가 사상 역시 중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왕안석은 춘추전국시대 최후의 승자가 되는 진(秦)나라를 부흥시켰던 상앙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어쩌면 훗날 신종 연간에 신법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타협 대신 냉혹할 정도로 반대파를 일축하고 자신이 믿는 바를 밀어나간 데에는 그런 법가적 신념이 배후에 있지 않나 싶다.

 

평소 책읽기를 즐겨한 왕안석은 저술에도 힘을 써서 왕학이라 불릴 정도의 일가를 이루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주류 유학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주희의 주자학에 밀려 이단으로 배척당하기도 했지만, 한 때 공자묘에 맹자 다음 가는 자리에 배향되기도 할 정도였다. 색을 멀리하고, 몸에 밴 검소한 생활로 정계에 투신해서도 타인에게 흠을 잡히지 않았던 그는 진정한 군자였다. 소인배 무리를 ‘유속’이라 부르며 극소수의 지기들과 교류를 고집했다. 불가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개보 선생은 강녕 은퇴 후, 평소에 흠모해 마지않던 종산을 오르며 다수의 불전에 주석을 달기도 했다고 한다. 당대 저명한 고승들과 교류를 마다하지 않았던 점도 저자는 빠트리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왕안석이 정계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건국 이래 쌓인 적폐들을 호쾌하게 일소하는 장면을 기대했는데 미우라 쿠니오 저자는 그런 중요한 이야기들을 평전의 후반으로 미뤄 두고, 어떻게 해서 왕안석이라는 문제적 인간이 성장해 왔고, 어떤 계기를 통해 궁극적 개혁에 이르게 되는 과정에 비중을 두고 설명한다. 다소 지루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이런 입체적 접근이야말로 후대에 열혈 팬들에게는 뛰어난 개혁가로 칭송받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간신으로 비난받게 되는지, 독자의 신중한 판단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양주의 관리로 관직 복무를 시작한 왕안석은 은현, 서주, 상주 그리고 파양의 지방을 16년 동안이나 전전하며 백성들의 실태를 직접 파악했다. 누구나 희망하는 중앙직 대신 각처의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누적된 시대의 적폐를 체험한 개혁가는 드디어 행동에 나서게 된다. 인종 대에 황제에게 올린 만언서에서 개보 선생은 훗날 자신이 실시하게 될 신법의 청사진을 제공했다. 상고주의자로 선왕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보수적 시각에서, 개혁을 위한 새로운 인재의 발굴과 양성, 종래 시부에 대한 내용으로 인재를 선발해오던 과거제의 개혁 등 국가경영 전반에 대한 개혁가의 빛나는 아이디어가 넘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송나라의 4번째 황제로 42년간 황제를 자리를 지켰던 인종이 죽고, 영종의 짧은 치세(4년)를 지나 약관의 나이로 젊은 황제가 신종은 지방관 출신 왕안석을 참지정사를 기용해서 변법에 나서기에 이른다. 개보 선생은 처음에 젊은 황제에게 강학을 통해 개혁정치의 이상과 이념을 숙지시키고자 했지만 청년 천자는 보다 신속한 개혁을 원했다. 1069년 균수법을 시작으로 마침내 연이은 신법들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대지주가 토지 겸병으로 막대한 이익을 내던 와중에 실시된 청묘법은 기근이나 흉년에 대비해서 상평창에 비축해 두었던 곡물과 돈을 이용해서 낮은 이자로 농민들에게 대출해주는 제도였다. 신법이 시행된 지 다음해, 왕안석은 재상의 자리에 올라 신법 실시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수도 변경에는 지방에서 수송해온 물자들을 관리하는 창고가 있었는데 이것을 관리하는 서리들에게 봉급을 지급하고, 위법을 저질렀을 시에는 엄벌에 처하는 하창법, 병사 관리와 향촌 관리라는 차원에서 실시된 보갑법, 역시 전쟁에 필요한 군마조달을 위한 보마법 등을 질풍노도처럼 시행했다. 개인적으로 왕안석의 신법 중에서 가장 근대적으로 판단된다는 현재 소득세에 해당하는 모역법이야말로 핵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공정하게 부여하는 세법이야말로 국가운영의 근간에 가장 중요한 방책이 아니었을까. 그동안 실질적 국가경영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시부 중심의 과거제 선발도 그의 개혁정책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 정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변법이 궁극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결국 신법 이데올로기를 수행할 전사들의 양성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우리 조선시대에도 정조가 개혁정치의 선봉을 담당할 인재들을 귀천을 가리지 선발해서 양성하는데 전념했지만, 왕의 사후 보수파의 반격으로 만사휴의가 되지 않았던가. 왕안석의 신법 역시 역사의 무대에서 비슷한 경로를 밟게 되었지만 말이다. 개혁행정가로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는 와중에도 개보 선생은 <삼경신의> 같은 기존 경전에 대한 주석서와 역시 모든 것은 <주례>로 통한다는 그의 생각에 입각해서 저술한 <주례신의>도 발표했다. 정말 대단한 실력이 아닐 수 없다.

 

그 외에도 도시 상공업 진흥을 위한 시역법, 농전수리 정책 등이 최고권력자 신종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질풍노도 같은 신법의 등장 만큼이나 사마광, 구양수, 한기 그리고 소식 같이 당대 저명한 학자, 보수정치인들의 반발도 거셌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구법당의 강경파 보수주의자들도 한 때는 개혁만이 제국의 살 길이라는 문제의식에는 공감했다는 점이다. 시간과 지위가 정계 유력한 사대부들의 사고마저 바꾸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리고 요즘으로 치면 대선을 앞두고 범람하고 있는 가짜뉴스처럼, 왕안석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도 차고 넘쳤다. 나중에 역사서에 오를 정도로 공신력을 획득한 음해공작은 성공적이어서 명대까지 그의 이름이 간신 재상전에 올랐다는 건 비밀도 아니다. 왕안석 신법이 실패할 수 없었던 이유는 우선 타협을 모르는 개혁 주도자의 올곧은 성정을 비롯해서, 기득권층의 반발을 무마할 당근정책이 전무했다는 점이다. 아울러 백성을 위한 정책이라고 했지만, 신법의 시행으로 정부 재정은 탄탄해졌을 지 몰라도 민생의 삶은 나아진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신법 때문에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은 예전에 하지 않아도 되는 노역과 세금을 내야 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들이었지만 당장 내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누가 개혁을 환영하겠는가 말이다. 무엇보다 신법의 지지자였던 신종이 신법 시행에 따른 부작용에 염증을 내기 시작했을 때, 이미 신법의 운명은 정해졌던 게 아닐까.

 

자신이 마음속으로 고향이라고 생각해온 강녕(지금의 남경)으로 은퇴한 왕안석은 부근의 선승들과 교류를 즐기며 산림처사의 삶을 만끽했다. 중앙 정치무대에 있을 때에는 시간이 없어서 뒤로 미뤄 두었던 고전연구에도 매진하고, 시부를 지어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자신의 심정을 담기도 했고, 엄정한 유학자에서 불교도로 변신해서 자신이 살던 양산의 저택을 절에 기부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신종이 죽으면서 구법당이 다시 정계에 속속 복귀하면서 왕안석이 심혈을 기울였던 신법들이 하나하나 무산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속세를 떠난 개보 선생이라지만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왕안석의 죽음을 시적으로 다룬 평전의 종언 부분은 정말 인상적이다.

 

다른 인물의 평전과 달리 미우라 쿠니오 작가는 <천상 심포지엄>이라는 부분을 할애해서, 간신 재상이라는 혹평과 위대한 개혁가라는 오명과 상찬을 동시에 받고 있는 문제적 인간 왕안석에 대한 비록 상상일지도 모르겠지만 치열한 고증과 각자의 입장에 의거한 어젠다 논쟁도 마련했다. 어쩌면 그가 쓴 천상 심포지엄이야말로 이 왕안석 평전의 핵심이 아닐까.

 

조기 대선을 앞두고 있다. 부족한 시간 때문에 검증이라는 미명 아래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네거티브가 난무하고 있다. 우리는 그런 소모적인 논쟁보다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진짜 정책대결을 원한다. 그러기 위해 촛불을 들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 왕안석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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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4-12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혁에 대한 의견이 두 가지로 나뉘어지겠지만, 저는 점진적 개혁을 선호합니다. 급진적 개혁도 좋습니다. 하지만 기성 세력의 반발심이 더 크게 생기는 역효과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