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난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세월호, 메르스 그리고 얼마 전 발생했던 5.8짜리 강도의 경주 지진까지. 내가 사는 아파트는 24층인데, 그런 강도의 지진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도달하니 아찔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중요시되어야 할 안전보다 빨리빨리 속도전과 천박한 물질만능주의 때문에 소중한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시절에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런데 이미 지금으로부터 69년 전에 이미 이런 사태를 예견이라고 한 듯,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소설 <페스트>에서 각자도생의 살풍경한 모습들을 스케치해냈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오랑에 어느 날 쥐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하면서 페스트(흑사병)가 도시 전역을 휩쓸기 시작한다. 누구나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페스트라고 명명된 공포는 시시각각 도시를 그리고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위협한다. 서사를 이끌어 가는 서술자는 객관적 시각에서 오랑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연대기처럼 기술한다. 그는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냉정하게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해서 기록한다.

 

여느 소설처럼 <페스트>에도 몇 명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가장 먼저 죽은 쥐를 발견한 베르나르 리외는 의사다.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리외는 도시에서 페스트라는 공포에 목숨을 걸고 맞서 싸우는 전사다. 리외는 사랑하는 아내를 요양하기 도시 밖으로 내보낸다. 그리고 수위 미셸의 죽음, 도시의 놀라움이 공포로 변하는 순간이 도래한다. 서술자의 기록대로, 유감스럽게도 전쟁만큼이나 많이 발생한 페스트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었고 속수무책이었다. 어떻게 작년에 많이 본 장면이 아니던가. 메르스가 전국을 강타하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병마의 위세가 잦아들기만을 기다리던 어느나라의 이야기가 아니였던가. 컨트롤타워의 부재는 말할 것도 없고. 1부의 엔딩을 보자,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

 

이쯤에서 리외와 주변 인물들을 살펴 보기로 하자. 리외의 늙은 동료의사 카스텔은 혈청을 제조해서 도시를 집어 삼키고 있던 페스트 균에 맞선다. 부유한 집안 출신의 장 타루는 오랑에 휴가 왔다가 도시가 폐쇄되면서 머물게 된 이방인으로 도덕적인 인도주의자다. 그는 리외를 도와 자원보건대를 조직해서,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리외를 돕는다. 코타르는 자살을 시도한 범죄자였지만, 페스트가 초래한 도시의 혼란이 반가운 처지다. 누군가의 불행이 또 어떤 이에게는 행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대변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조제프 그랑은 시청의 비정규직 보조 직원으로, 페스트에 관련된 통계 업무 자원봉사에 나서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레몽 랑베르를 오랑에 갇힌 신문기자로 꼼수를 동원해서 오랑을 탈출하고자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개심해서 보건대에 지원한다. 사랑하는 아들을 페스트에 잃은 오통은 수사검사로 규제보다 처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관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파늘루 신부는 열렬한 강론을 통해, 마치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한 도시가 죄값을 치르고 있는 중이니 반성하라고 대중에게 통렬하게 외친다. 하지만, 죄없는 오통 검사의 어린 아들이 페스트에 쓰러지는 것을 보며 페스트 사태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일순간에 모든 것을 앗아가는 무서운 질병이 도시를 휩쓰는 동안에도 복원되는 일상의 놀라운 항상성에 놀랐다. 되돌아보면 작년에 메르스가 전국을 강타했을 적에도 누군가는 아이의 돌잔치를 했고, 커플들은 꾸준히 결혼식을 올렸고 하객들은 그들을 찾아 아낌없이 축하해줬다. 그 즈음에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셔서 두려운 마음에 손소독을 하고 방명록에 이름을 적으면서 중환자실에 계신 아버지를 찾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와서는 아마 뜨거운 육개장을 먹었지 아마. 그렇게 질병과 고통의 시간들을 이겨낸 우리들처럼 오랑 사람들도 식량과 와인의 결핍 속에서도 일상을 즐겼다. 그들은 여느 때처럼 연극 관람을 했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어쩌면 페스트가 상징하는 건 파늘루 신부의 강론처럼 일상에 파묻힌 우리들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르겠다. 메멘토 모리, 죽음이 일상화되었지만 의도적으로 그 죽음을 무시하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리외와 타루 그리고 그랑 그룹은 한 명의 생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페스트가 휩쓰는 오랑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한 카뮈의 조국 프랑스의 모습으로 비친다. 한때 전 유럽을 휩쓴 나치 독일의 위세에 눌려 협력하던 꼴라보들은 조국의 위기가 오히려 그들에게는 기회인 것 마냥 설쳐댔지만, 조국해방을 위해 그리고 한 명의 생명이라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 가며 싸운 전사들을 정의는 외면하지 않았다. 계절이 겨울로 접어 들며, 그렇게 위세를 부리던 페스트는 마침내 소멸하기에 이르렀지만 이대로 갈 수 없다는 듯 의사 카스텔, 파늘루 신부 그리고 타루의 생명을 앗아간다. 그것은 마치 마지막 번제물을 요구하는 것처럼 야속하기만 하다.

 

죽음의 공포가 막바지로 치닫는 가운데, 보건대의 용사들인 리외와 타루 사이에 피어나는 인간 우정에 대한 작가의 스케치가 돋보인다. 우정을 위해 함께 해수욕을 하자는 제안이 엉뚱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일상의 놀라운 복원력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질병이 영원하지는 않으니, 그렇게 질병(페스트)이 물러가면 우리는 또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암시일까. 소설에서 페스트라는 질병은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어하는 인간의 갈망에 대한 장애물이자 억압을 상징한다. 예의 억압은 우리 주변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던가. 불의에 의거하는 시위를 막는 억압, 정당한 파업권을 주장하는 금융노동자들의 파업참가를 교묘하게 방해하는 억압, 귀족노조라는 프레임으로 내가 가진 권리를 조롱하는 언론의 억압 같은. 그런 억압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니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다.

 

지난 경주 지진 때,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아야 한다는 노부부의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다. 억압과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역시 연대 뿐이라는 위기 상황 속의 계시였을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6-09-27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건물 2층 이상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지진 흔들림에 공포감을 많이 느낀 것 같습니다. 저와 같은 지역에 사는 친구의 집이 아파트 5층에 삽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건물의 흔들림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저는 빌라 1층에 사는데,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서 건물 파편에 깔려 죽는 상황이 생길까봐 무서워요. 그래서 건물 밖으로 뛰쳐나오면 안심할 거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진 대처 매뉴얼에서는 책상 밑에 숨으라고 지시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