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을 읽는 동안 오래 전에 본 영화가 계속 떠올랐다. 그 영화의 제목은 바로 <미저리>. 스티븐 킹의 걸작 중의 하나로 원서로 구입했지만 정작 읽을 기회는 없었다. 편혜영 작가의 <홀>을 읽으면서 <미저리>의 기시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소설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강원도로 가는 짧은 여행길에 비극적인 교통사고가 났다. 동승했던 아내는 즉사했고, 남편 오기는 척수가 마비되고 턱이 부서졌으며 안면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의사는 오기가 살아난 것은 의학의 힘이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편혜영 작가는 사고를 전후해서 오기 부부에 있었던 일들을 오기의 플래시백을 통해 독자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한다. 도대체 15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부부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천운으로 살아난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가혹한 운명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미시적 접근을 시도한다.

 

오기는 사고가 복기하는 와중에 자신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된 두 명의 여성을 회상한다. 한 명은 자신이 열 살 때, 치사량의 약물복용으로 죽은 어머니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자신이 사랑했던 아내, 두 사람 모두 이제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 거동조차 할 수 없고 의사소통도 불가능한(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포인트다) 가운데 아무데도 의지할 데 없는 오기에게 또 한 명의 여성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바로 외동딸을 잃은 장모였다. 핵가족제도가 일상화된 현대가족 시스템에 전신마비가 된 사위를 돌보는 장모의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파국의 전조를 슬쩍 내비친다. 사위 오기를 돌보는 와중에 장모는 오기 부부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하게 기록한 딸의 기록을 보게 되고, 그 순간부터 오싹한 영화 <미저리>의 장면들이 중첩되기 시작한다.

 

동경과 욕망을 구별하는 법을 서서히 익혀나가는 것 같았다. (19쪽)

 

조선소와 부품생산업체를 통해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지리학을 전공하겠다는 아들 오기의 미래를 비웃는다. 하지만 오기는 아버지의 예상과는 달리 석사와 박사 과정을 차례로 밟아 마침내 모교의 정교수의 자리를 성취한다. 오기는 대한민국 대부분의 중년들이 밟는 코스대로 성공하기 위해 우연과 술수 그리고 부도덕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타인이 보기에 강단에 서는 멀쩡한 교수님의 내면세계가 그렇게 도덕적으로 우월하지 않다는 평범한 진리를 작가는 세밀하게 파헤친다. 반면 오기의 아내는 처음에는 저명한 저널리스트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녀의 의도대로 일이 되지 않자 쉽사리 포기하기를 반복한다. 오기는 그녀가 정말 되고 싶은 게 그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진다. 자기도 속물이라 세상 사람들을 비딱한 시선으로 보는 걸까. 평소라면 난치병 완치를 희망하는 장모의 발언에 이기죽거렸을 거라는 부분에선 아내만큼이나 남편 오기도 냉소주의자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거린다.

 

이어지는 오기의 플래시백은 마당이 넓은 집을 아내의 주장으로 매입하고, 친구들을 불러 바비큐 파티도 하는 유쾌한 시절로 돌아간다. 오기의 동료들이 와서 파티를 하고 돌아간 뒤, 아내는 갑자기 마당을 온통 뒤엎고 지렁이가 살 수 있는 토양으로 정원가꾸기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동료 제이와의 관계를 의심하던 아내의 의부증은 현실이 되고, 연이은 임신을 위한 인공 수정과 시험관 시술의 실패로 부부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들의 마지막 강원도 여행은 이별여행이 아니었을까.

 

오기의 플래시백이 그의 내면세계에 대한 고백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이끌어 가는 하나의 트랙이었다면, 또다른 트랙이자 그의 삶을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현실적인 위협은 장모의 기이한 행동이다. 편혜영 작가의 전작 <아오이 가든>이나 <사육장 쪽으로> 등에서 등장했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홀>에서도 동의반복된다. 평생 윤리선생으로 살아온 잔소리쟁이 남편을 잃고, 사랑하는 외동딸마저 잃은 장모는 사위의 운신과 재활 돕는다는 명목으로 거처를 옮겨가며 오기 간호에 나선다. 하지만 그것은 외견상 보이는 것일 뿐이고, 실제로는 수술과 재활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 강단에 복귀하겠다는 오기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거듭한다. 일탈적 행동을 일삼는 입주 간병인과 재활을 돕는 물리치료사를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내친 장모의 행동은 과연 그녀가 사위의 회복을 바라는 것일까라는 궁극적 질문을 하게 만든다. 어쩌면 장모의 일탈적 행동은 일종의 복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무언가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 것도 작가의 스타일이 아니었던가. 그런 점을 생각해 본다면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대충 윤곽이 잡히기도 한다.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학문적 성취에 대해 기술하는 부분에서는 현실세계에 복귀하겠다는 오기의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도 있었다. 자신이 지리학 교수였지만, 지도로 삶의 궤적을 살피는 일은 아예 불가능한 미션이었노라는 고백이 이어진다. 지리학이 세계를 그리는 과학이라면, 사람들이 지리학과 헷갈리는 역사학에 대해서는 세계에 대해 쓰는 문학의 일종이라는 간단명료한 정의로 두 학문을 구분하기도 한다. 한 때 지리학을 꿈꾸던 역사학도로서 이보다 명쾌한 정의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최고다 정말. 삶은 실패가 쌓일 뿐이지, 그 실패의 누적으로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들려주기도 한다. 한편, 어려웠던 임용 전 시절에 대해서도 희망이 없어서 우정이 번성하던 시기였노라고 정리한다. 이어지는 장모과의 비극적 관계의 전개보다도 이런 부분들이야말로 소설의 보석 같은 핵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원도 여행길에서 아내가 발표하겠다고 공언한 한 인간에 대한 고발문은 명백하게 남편 오기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아내는 비슷한 고발문으로 성취를 이루지 않았던가. 우연과 술수로 타락해 가는 사십대 중년에 대한 리포트는 도덕적 해이와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질타로 이어졌고 그 순간 벌어진 사고로 아내는 죽었고, 오기는 만신창이가 되긴 했지만 살아남았다. 편혜영 작가의 소설 <홀>은 어떤 교란도 없는 무사태평한 세상을 꿈꾸지만, 자신이 행한 업(karma) 때문에 스스로 판 구덩이(hole)에 빠진 남자에 대한 고발문이다.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일상은 또 어떠냐고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6-08-12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척 재미있게 읽고 많이 권한 소설예요!^^ 반갑네요!^^

레삭매냐 2016-08-12 10:36   좋아요 1 | URL
어제 빌려서 단박에 읽었답니다 -
아주 오랜 만에, 그것도 다시 독서모임으로 만나는
편혜영 작가라서 그런지 옛 기억이 다시 나는 그런
느낌이었답니다 :>

[그장소] 2016-08-12 10:39   좋아요 0 | URL
덕분에 저도 제가 쓴 홀 ㅡ리뷰 찾고있어요.ㅎㅎㅎ 이게 원래 식물애호˝라는 단편을 장편화 한 거거든요! 짜릿한 맛이 있어요~^^

레삭매냐 2016-08-12 11:06   좋아요 1 | URL
미처 몰랐네요 :>
외국에선 그렇게 자신이 처음에 쓴 단편을 확장해서
장편으로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더라구요.

아마 편혜영 작가도 그런 시도를 한 모양입니다.

[그장소] 2016-08-12 11:23   좋아요 0 | URL
그런 작품들이 꽤 있어요. 확장판 같은! 우리 작가들도 더러 더러 있더라고요~^^ 그런걸 찾음 또 재미있고 유쾌하죠!^^( 이 글 이전에 어떤작가였나 몇몇 알던 이름은 생각안나서 ..기억나면 알려드릴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