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나의 선택 1 - 3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3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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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많이 흘렀다. 평민귀족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술라가 막 떠오르던 시절의 이야기에서 영광과 위엄으로 가득 찼던 시절을 보낸 두 영웅이 무대에서 퇴장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이미 마리우스는 세상을 떠났고, 펠릭스라 불리던 호시절의 술라 역시 말년을 앞두고 다시 한 번 로마, 아니 세계의 패권을 쥐고자 동방원정을 마치고 이탈리아 브린디시움에 상륙했다. 영웅들의 뒤를 이을 새로운 영웅들이 부상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은 바로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율리우스 집안의 카이사르다.

 

이탈리아 전쟁(동맹시 전쟁)이 공화정 로마의 명운을 건 고귀한 목적과 절박한 이유를 내세운 그런 전쟁이었다면, 술라와 마리우스-킨나를 승계한 카르보의 두 번째 내전은 그저 누가 로마를 지배하는가에 대한 싸움이었노라고 콜린 매컬로 작가는 단정 지어 말하고 있다. 누가 봐도 확실한 정권교체기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대의를 쫓는 이들도 있었지만, 미래의 권력과 재화를 위해 뛰는 기회주의자들도 소설에 수없이 부침을 거듭한다. 왜 이렇게 현실 세계의 그것과 닮아 있는 걸까.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는 역사소설이라는 범주를 뛰어 넘어 현실세계로 지평을 넓히는 수작이었다.

 

놀라운 건, 이천년 전의 역사적 사실에 무대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심리상태와 대화를 통해 살을 붙이는 콜린 매컬로 작가의 수려한 문학적 솜씨다. 물론 이 방대한 시리즈를 위해 시력을 잃을 정도로 수많은 문헌을 조사했다고 들었는데, 저가의 그런 노고는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상상의 경계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가령 예를 들어 술라의 살생부에 올라 목숨을 건 도주를 하던 중에 카이사르가 학질(한 겨울에 말라리아에 걸리다니!)에 걸려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카이사르의 모친 아우렐리아가 자신의 아들을 독재관 술라에게 살려 달라고 청원하는 과정은 또 어떤가. 역사에 남은 기록은 아지만 충분히 가능한 설정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풀잎관> 시리즈를 아직 읽지 못해 저간의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오래 전에 읽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남긴 기억의 편린과 인터넷 검색을 통해 대강의 역사적 윤곽을 따라잡았다.

 

토지를 소유한 전통 귀족 가문이 로마를 이끌어야 한다는 모스 마이오룸에 입각한 술라파와 새로 부상한 기사계급으로 대표되는 카르보파는 로마를 양분했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가치와 정부에 대한 사고 그리고 미래의 로마를 상이한 집단의 사회적 통합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폭력적 제로섬 게임으로 승부를 가려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내전발발의 원인이었다. 어쩌면 이 상황은 공화정 로마에서 제정 로마로 가는 거대한 사회적 시스템 이행기의 전초전에 해당한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탁월한 정치적 인간이었던 술라가 고민했듯이, 이런 사회적 통합은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블랙홀 같은 문제였다.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대화와 타협이라는 방법이 제시되지만, 고대 로마에서는 전쟁 혹은 내전이라는 폭력적 방법이 최종 해결책이었다. 고대나 현대나 소모적 방법 대신 창조적 방법을 강구하고 시행하는 것이야말로 최고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다. 이 문제는 시리즈에서 다룰 가장 위대한 로마인이 설계를 맡게 될 것이다.

 

한편, 카르보 휘하 장군들과 참모보좌관들의 무능한 전략적 판단 때문에 현직 집정관이라는 합법성과 이탈리아 본토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층이 주도하는 옛 로마 공화정의 부활이라는 대의명분을 걸고 내전에 나선 술라에게 굴복하고 만다. 술라에게 극렬하게 저항한 반대파의 주축은 평민출신 귀족과 마리우스 시절에 부를 쌓은 기사계급 그리고 기원전 3세기 때 이탈리아에서 로마의 패권에 도전했던 삼니움 전쟁의 후예들이었다. 카르보와 마리우스 2세로 대표되는 반대파를 제압한 술라는 대대적인 숙청에 나선다.

 

바로 이 시점에서 소설의 제목인 포르투나(행운의 여신)의 선택이 등장한다.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술라를 필두로 한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모두 자신이야말로 포르투나가 선택한 영웅이라고 주장한다. 별명이 펠릭스(행운아)였던 술라는 제외하고, 내전 무대에서 병참과 조직 운영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포르투나의 선택에 근접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술라의 명령대로 시칠리아로 가서 로마의 안정적인 식량공급을 확보하고, 아프리카로 도주한 카르보의 잔당을 소탕한 폼페이우스가 요청한 개선식 요청을 술라는 편지로 간단하게 무시한다. 정당한 재판 없이 현직 집정관인 카르보를 죽인 젊은 지휘관의 야만성을 술라는 냉정하게 비판하면서 죽은 아버지의 별명을 따서 “꼬마 도살자”라고 부른다. 작가는 폼페이우스가 천성적으로 동정심이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훗날 정치적 라이벌인 카이사르와의 대결에서 그가 패배하게 되는 결정적 요소가 아니었는지 유추해 보게 된다.

 

독자는 이미 알고 있지만, 진정한 포르투나의 선택은 바로 카이사르로 귀결된다. 이제 겨우 17세가 된 카이사르는 마리우스가 채운 유피테르 대제관이라는 족쇄에 걸려 군사적 업적을 세우고 로마의 프린켑스가 되겠다는 야망을 접은 상태다. 하지만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술라는 십대의 카이사르에게서 수많은 마리우스를 보았다고 했다. 7번의 집정관 경력과 불세출의 전쟁 영웅이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경력을 뛰어넘는 가장 위대한 로마인의 모든 자질을 갖춘 영웅이 드디어 본격적인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카르보와 마리우스 2세로 대표되는 반대파를 제압하고 대대적인 숙청에 나선 술라는 카이사르에게 킨나의 딸과 이혼하라고 명령한다. 정치개혁에 앞서 모든 것을 종교에 의존하는 로마 관습을 개선하기 위해 선출직 제관을 폐지하는 개혁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현재 로마의 프린켑스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독재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목숨을 건 도주에 나선다. 궁극적으로 카이사르의 항명은 한낱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던 카이사르의 명성을 로마 정계에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난다 긴다 하는 실력자들이 독재관의 서슬퍼런 권위 앞에 끽소리 못하고 시절에 철부지 소년의 도발은 충격적인 정치적 퍼포먼스였다. 콜린 매컬로 작가는 그렇게 가이우스와 술라의 대결을 마무리 짓고, 자연스럽게 새로운 시대를 장식할 영웅들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모멘텀을 제시한다.

 

개인적으로 <포르투나의 선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폼페이우스와 바로가 나눈 대화에 등장하는 술라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존엄”(디그니타스)에 관한 부분이다. 로마 귀족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인 존엄은 무형의 자산이면서 어떤 형태로든 확장이 가능하며, 망각과 상실을 뛰어넘는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가치의 총합이라고 한다. 콜린 매컬로가 분석한 술라의 존엄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을 준비하며 공화국 재건에 여념이 없는 펠릭스 술라의 본질을 규정하는 동시에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술라에게서 빼앗은 그가 당연히 누려야할 것들을 되찾기 위해 동족상잔의 비극과 가혹한 시련을 견뎌야 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술라가 제시한 로마인의 존엄은 역시 가장 위대한 로마인에게 전승되어 확장될 거라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또 한 가지 아무리 종신독재관인 술라는 합리적 보수주의자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독재자답게 반대파를 숙청하는 데 있어 무자비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내전기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카이사르 역시 동의하고 있다. 로마를 다시 접수한 뒤에 자기 권력의 기반인 병력을 해산하는 순간,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냉철한 판단 역시 주목할 만하다. 사회시스템 재건의 영속을 위해 까다로운 법률적 절차를 준수해야 한다는 점도 독재자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필요에 따라 생략해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관철시키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 시절이 2016년이 아니라, 기원전 1세기경이라는 점도 무시하면 안될 것이다.

 

자 이제 무대는 준비되었다. 그동안 역사 무대를 휘젓던 영웅이 퇴장하면, 다음 세대의 영웅들이 등장해서 로마 인민들과 포르투나 여신의 간택을 받기 위해 가열찬 투쟁을 벌일 것이다. 콜린 매컬로는 바로 그 과정을 조율하는 문학적 마법사로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독자를 인도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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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6-08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도 가제본을 먼저 읽으셨군요. ^^

레삭매냐 2016-06-08 21:44   좋아요 0 | URL
촉박하다고 생각했는데 재밌어서 생각보다 금세 읽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