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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외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42
소포클레스 지음, 김기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5월
평점 :
이 책을 읽게 된 순전히 황현산 선생의 추천 덕분이었다. 모두 세 권의 책을 추천해 주셨던 것 같은데, 패트릭 리 퍼머의 <그리스의 끝 마니>를 먼저 읽기 시작했지만 소포클레스의 비극이 분량도 더 적고 읽기 쉬워서 손에 잡은 김에 다 끝내 버렸다. 누구나 다 아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고대 그리스의 정치인이자 극작가인 소포클레스가 테바이 3부작으로 재창조해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읽으면서, 이런 희대의 비극의 원형이 도대체 어디서 무슨 이유에서 태어났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런 신화를 비극으로 재창조한 소포클레스의 실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소포클레스가 무려 기원전 5세기경에 저술한 테바이 3부작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 그리고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아버지인 테바이의 라이오스 왕을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해서 저주 받은 아이들을(안티고네도 그 중의 하나이다) 낳고, 비극적 운명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찔러 실명하고 조국 테바이를 떠나 망명 중에 아테나이의 콜로노스에서 죽고, 그 자식들 역시 비극적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기본 줄거리다. 왜 오이디푸스는 이런 가혹한 아폴론의 신탁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던가. 당대까지만 하더라도 대자연의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인 인류의 숙명을 깨달은 인간을 향한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노력이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자본주의 신화가 붕괴되고 있는 마당에 그래서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더 절실하게 와 닿는다. 인간이 제 아무리 노력해서 운명을 벗어나려고 사력을 다해 노력하더라도, 신이 설계해 둔 운명은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테바이 3부작을 연대순으로 발표하지 않고, 비극의 완성에 해당하는 <안티고네>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버지 오이디푸스 왕이 씻을 수 없는 수치심에 테바이를 떠나 유랑걸식을 하게 되자, 가련한 아버지를 부양하는 대신 권력에 대한 욕망에 휩싸여 파멸적인 사투 끝에 모두 죽어 버린 오이디푸스의 아들들인 폴뤼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 다시 이야기를 되돌려 보면 콜로노스에서 마지막 거처를 찾던 오이디푸스를 찾아와 동생에게 빼앗긴 테바이의 왕권을 찾게 도와 달라는 폴뤼네이케스의 요청에 오이디푸스는 저주를 퍼붓지 않았던가. 신의 신탁에 버금가는 부모의 저주는 그대로 현실이 되었고, 죽은 이오카스테의 오라비로 결국 테바이의 최고권력자가 된 크레온은 신의 섭리를 무시하고 폴뤼네이케스의 매장을 불허하면서 갈등을 조장한다. 문제는 처벌을 무릅쓰고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바로 자신의 아들 하이몬의 연인이었던 안티고네였다는 점이다. 소포클레스는 이 비극에서 착오-발견-자기 결정이라는 비극의 패턴을 위한 교묘한 인과관계를 설계했다.
저자는 비극의 설계자답게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난제를 해결하고 테바이의 왕이 되어 영화를 누리는 순간들은 철저하게 배제한다. 이것도 비극을 비극답게 만드는 또 하나의 장치였을까. 테바이 비극 시리즈를 읽다가 궁금한 점 중의 하나는 저주의 신탁이 왜 오이디푸스가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 실행되었느냐는 점이다. 그것도 자식을 넷씩이나 낳아서, 인간이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던 그런 인생의 최절정에서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나락으로 추락을 시작한다. 신화에서 모든 금기는 깨지게 마련이고, 신탁이나 예언들은 하나 같이 빗나가지 않고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테이레시아스가 인간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예언을 하고, 그 예언이 실행되어 가는 과정은 흥미롭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스멀스멀 다가오는 비극의 전조를 예감하면서도 최종국면에서 기다리고 있을 비극적 진실을 구도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인간의 존재를 소포클레스는 담대하게 그려 나가고 있다. 여담으로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코러스들의 존재에 대해, 오래전 좋아했던 우디 앨런의 영화 <마이티 아프로디테>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그 코미디 영화에서도 코러스들은 쉴 새 없이 노래하며 떠들어 대면서 비극의 전조를 알리고 경고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지 않았던가. 물론 주인공들이 그들의 조언을 듣진 않았지만. 어쩌면 우리 인간사도 그런 게 아닐까. 객관적 시각으로 판단해 보면 하지 않을 행동들을 난제에 빠져 그런 능력을 상실한 인간들은 주저 하지 않고 실행에 옮기지 않던가 말이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숙명을 받아들이고 정처 없이 방랑하던 가운데 마침내 도착한 콜로노스에서 영웅적 죽음을 준비하는 오이디푸스의 모습이 그려진다. 인간의 숙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피를 선택했지만, 권력욕에 불타는 크레온와 아들 폴뤼네이케스는 오이디푸스의 평안에 도전한다. 테바이의 수호라는 미명 아래 자신과 안티고네를 강제로 테바이로 압송하려는 시도를 또다른 아테나이의 영웅 테세우스의 도움으로 무산시키고, 자식의 도리는 다하지 않았으면서도 권리만 주장하는 아들 폴뤼네이케스의 청원마저 단칼에 거절한 소포클레스가 사랑한 도시 아테나이를 축복하며 하데스의 세계로 가는 길을 받아들인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인간은 모든 운명을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 걸까? 하지만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아등바등 대며 운명에 저항하며 삶을 개척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본질이 아닐까.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히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너무 성급하게 읽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페이지에 주석을 달아 주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모르는 부분에 달린 주석 표시를 보면서도 독서의 호흡이 끊길까봐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다음번에 읽게 되면 좀 더 여유를 가지고 긴 호흡으로 음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넥스트 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