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양을 잃다 - 책과 인간의 운명을 탐구해온 한 편집자의 동서고금 독서 박물지
쓰루가야 신이치 지음, 최경국 옮김 / 이순(웅진)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내가 이 책을 알게 된 건 정민 선생의 <책벌레와 메모광> 덕분이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는 정말 즐겁다. 아마 선생도 당신의 책에 실린 글 중에 쓰루가야 신이치의 신세를 진 부분도 있지 않을까? 그럴 정도로 책모퉁이에 새겨진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독서 박물지라는 주석이 바로 와 닿는다.

 

이 책을 지난달 30일에 사서 바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하도 다른 책들을 읽어 대는 바람에 무려 한 달이나 걸려서 읽게 됐다. 사실 이런 에세이류의 책들은 마음먹고 읽기 시작하면 금세 다 읽을 수도 있지만 또 그렇게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생각 같아서는 아무 때나 죽 펼쳐서 궁금한 것부터 읽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완독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이번에는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었다.

 

쓰루가야 신이치라는 분은 아마 일본의 저명한 독서가인 것으로 사료된다. 그만큼 동서를 아우르는 박학한 지식을 바탕으로 책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책 사이에 은행나무 이파리를 끼워 놓아, 책벌레를 쫓아다는 이야기는 이미 정민 선생의 책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꽤 오래 전에 중국 당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명판관 디 공> 시리즈 중의 한 권인 <황금살인자>를 읽은 적이 있는데 네덜란드 출신 로베르트 반 훌릭에 대한 소개도 이 책에 실려 있다. 나가사키를 통해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일본에 전파해준 화란(네덜란드)에 대한 후의가 담뿍 담겨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도치기현에 있었던 화적상이 알고 보니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만들어진 에라스무스의 목상이었노라는 기원을 찾는 이야기 또한 흥미롭다. 바다 건너 네덜란드에서 만들어진 목상이 일본으로 건너가 신묘한 힘을 발휘했다는 설화까지 곁들여져 지금은 일본의 국보가 되었다고 하던가.

 

사실 저자만큼 일본 고전문학과 데라다 도라히코 같은 문인들의 이름이 낯설어서 그런 진 몰라도 숱하게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주석이 없다면(사실 주석을 읽느라 시간이 많이 소용됐다) 이 박물지는 좀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모르는 이가 없는 김소월이나 박목월 같은 시인들 그리고 최치원이나 설총 같은 당대의 석학들의 이름을 어떻게 알겠는가 말이다. 지식의 모자람 때문에 책에 몰입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오래 전에는 책을 읽을 적에 음독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근대로 넘어오면서부터 묵독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설명도 재밌다. 하긴 요즘에는 책 자체를 대하는 이들이 적어져서 묵독이건 음독이건 간에 지하철에서 독서하는 사람을 찾는 놀이까지 생겼다고 하지 않던가. 책 읽는 것을 사명으로 여겨 하루에 9센티미터씩 책을 읽었다고 하는 다독가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하는데, 이렇게 책을 사랑하던 이들이 존재하던 시절 이야기는 이제 전설처럼 아련할 따름이다. 책이 귀하던 시절에는 책이 너무나 소중해 책읽기 역시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근대가 되면서 대량생산과 교육의 결과로 누구나 책을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책읽기에 무관심하게 된 건 아닐까. 하긴 니체의 말마따나 책을 소장하는 것과 읽는 행위 그리고 그 책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16세기 말, 명나라 시대 남창에서 예수회 수도사였던 마테오 리치가 기발한 기억술을 선보였다는 사실도 쓰루가야 신이치는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 전에 특별한 연관성을 사물에 부여해서 기억하면, 아무리 양이 많더라도 수월하게 기억할 수 있다는 말도 있는데 나같이 만날 깜빡깜빡 하는 사람에겐 그 방법이 통할지 모르겠다. 미국 예일대 출신의 조너선 스펜스 교수가 쓴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이란 책을 무려 5년 전에 읽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 허망할 따름이다. 그 책을 읽느라 제법 고생한 기억만 남아있다. 함께 소개된 고대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의 일화도 어디선가 읽었는데 당최 기억이 나지 않아 안타까웠다.

 

<정독>편에서는 책을 무게로 달아 읽었다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무식하다고 핀잔을 주며 단 몇 권의 책이라도 바르게 읽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것이 아니냐고 독자에게 묻는다. 그 글을 읽으며 난삽한 독서를 하는 나같이 우매한 독자에게 훈계하는 고수의 죽비 같이 들렸다고 하면 과언일까. 자기변명 같지만, 세상은 넓고 읽어야할 책은 너무 많기에 한 권의 책을 꾸준하게 몇 번씩 읽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말하고 싶다. 도대체 쓰루가야 신이치 같은 고수들은 어느 시간에 그렇게 많은 독서를 한 걸까. 책읽기가 업이 아닌 바에야 도무지 신기하기만 할 뿐이다.

 

유시민 선생은 자신에게 흥미롭지 않은 책은 과감하게 던져 버리라고 했는데, 쓰루가야 신이치 작가는 다른 방식의 독서를 후기에서 권하고 있다. 지금 읽는 책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내던져 버릴 것인가. 저자는 잘 모르면 모르는 대로 꾸준하게 독서하라고 충고해주고 있다. 인생을 살며 체험이 쌓이고, 독해력이 향상되면(그러기 위해선 독서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시키고 변용시키는 과정이야말로 우리 독서인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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