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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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출근하는데 시청 앞에 조성해둔 꽃밭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가지 꽃들이 눈에 띄었는데, 그 중에서 유난히 흰색 소국만 다 시들어 죽어 있었다. 죽은 소국 때문인가, 어디선가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꽃도 그렇듯이 우리네 인생도 유통기한이 다 되면 흙으로 돌아가겠지 하는 생각에 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난 주말에 읽은 정용준 작가의 소설집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에는 유난히 그런 죽음과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았던 것 같다.

 

모두 8개의 단편 소설이 들어 있는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에는 군 의문사와 관련된 소설이 두 개나 들어있다. 건군 이래 해마다 1개 대대급 병사들이 군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갔다는 뉴스를 듣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정용준 작가는 <이국의 소년><안부>에서 바로 이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전자에서는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로 국가유공자인 아버지의 숨기고 싶은 과거를 의식 있고 정의로운 청년으로 성장한 아들의 현재에 대입시키고 있다. 이 정의로운 청년은 병영에서 총기자살을 시도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병상에 누워 있다. 독자는 아버지의 독백을 통해, 남조선 용병으로 베트남에 파견된 아버지가 타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신념 아래 무슨 일을 했는지 담담한 어조로 고발하고 있다. 그 업보는 정의로운 아들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일까. 그 무게가 감당하기 힘들어 보인다.

 

<안부>에서는 6년 전에 의문사당한 아들 이준 소위를 잊지 못하는 어머니의 초상이 담겨 있다. 자식으로서 가장 큰 불효가 부모보다 먼저 가는 것이라고 했거늘, 금지옥엽 같은 아들을 그렇게 잃은 아버지마저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하겠다며 쫓아다니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추락하는 이중의 비극이 찾아온다. 죽은 아들의 어머니는 아들의 시신 인수를 거부하고,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시스템의 조직적 은폐와 대중의 무관심 그리고 쏟아지는 경멸의 시선에 버거울 따름이다. 종교에서 의지가지를 찾아보려고도 하지만 그 역시 난망하기만 하다. 용서하라며 그리고 잊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에, 그럼 죽은 사람은 죽어야 하냐며 어머니는 울부짖는다. 그들에게 과연 진정한 위로와 격려는 어떤 형식이어야 하는지, 종교의 힘으로도 그리고 신의 대리인도 기피하는 죽음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개들>은 기묘한 이야기다. 역시 군대 시절 목격한 남한산성에서 진지구축 공사를 하다 개도축장에서 본 죽은 개들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아주 어려서 고기가 귀하던 시절, 무슨 고기인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그렇게 먹던 고기가 개고기였다는 사실을 아주 나중에야 비로소 알게 됐다. 지금은 개고기를 먹지 않지만, 아는 동생이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된 개지옥 시리즈를 보고서는 그렇게 좋아하던 보신탕을 일절 끊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연상됐다. 참고로 그 동생은 애견가이기도 하다. 개사랑과 먹거리로서의 사랑은 소용되는 지갑 속의 현찰의 두께 정도이려나. 사철탕과 건강원에서 소비되는 개들은 어디서 온 걸까. 그리고 식육으로서 저울에 올라가는 그네들의 살점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작가는 마치 한 편의 리포트를 보여주듯 그렇게 상세하게 기술해준다. 주인공 나는 유사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곰사장에게 고아원에서 픽업되어 온 기술자이자 동업자다. 멀리 서양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 세대와 아버지 세대의 불화와 반목은 해결 불가능한 과제가 아니던가. 불화는 폭력을 낳고, 폭력은 그 이상의 끔찍한 결과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그렇게 엘리베이팅된 불화의 연쇄폭력의 종착점은 고통을 모르고 자라 기계처럼 작동하는 나의 유일한 친구 병구의 죽음으로 촉발된 곰사장에 대한 처절한 응징이고 개들의 간식거리다. 그래서인지 곰사장의 죽음은 이미 식육으로 변해 버린 개들처럼 무덤덤하게 그렇게 다가올 뿐이다.

 

표제작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도 오래전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다. 화자는 어머니를 살해한 아버지의 자식이다.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으며, 이모의 아들이 되어 무심하게 생을 살아왔다. 그의 삶에서 적당한 선과 거리감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 암묵적 약속이다. 그는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환자들의 신장 투석을 담당하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감옥에서 있어야 할 아버지가 도저히 감옥에서는 치유할 수 없는 신장 투석 건으로 일시 형집행으로 가석방되어 화자가 일하는 병원에 와서 투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화대상자의 병을 고쳐 다시 형집행을 시키겠다는 당국의 설정도 우습지만, 아무런 감정이 없는 생물학적 아버지가 불쑥 우리는 그래도 혈육이 아니냐며 말을 건네는 장면은 희비극에 가깝다. 몸의 유독 물질을 제거하는 기능을 맡은 신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 투석 과정을 통해 피를 필터에 걸려 맑게 하지만 우리가 살기 위해 섭생하는 과정 자체가 다시 피를 오염시킨다는 사실이 영원히 반복되는 무한 루프의 그것이 떠오른다. 삶에 대한 공복으로 주인공은아버지가 탐하는 계란을 두 쪽으로 내어 먹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마지막에 실린 <새들에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네>는 어느 날 갑자기 9달된 딸아이를 남겨두고 훌쩍 세상을 떠나 버린 누이에 대한 제망매가다. 일을 그만두고 어머니에게 얹혀 무위도식하며 언젠가 소설가가 될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사는 나는 아버지도 모르는 조카딸이 그저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그리고 아이를 돌보다 어두운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그런 존재로 그려진다. 사고사로 처리된 누이는 가해자인 트럭운전사 말에 의하면, 고의로 길에 뛰어 들었다고 하는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 걸까. 이른 치매기와 유방암 수술로 한쪽 가슴을 잃은 어머니가 과연 누이가 남긴 재인이를 돌볼 수 있을까? 소설 속의 화자는 내내 재인이에게는 가슴이 온전한 엄마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에 대한 마땅한 대안은 없어 보인다. 대학에서 러시아를 전공해서일까, 그는 이웃에 사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마디나에게 기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그녀 남편의 황당한 제안은 혀를 내두르게 만들지만 말이다.

 

소설집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가족이라는 사회의 최소 단위에서 벌어지는 어쩌면 외면하고 싶은 서사들의 모듬회라고 해야 할까. 정용준 작가가 선보인 8가지 이야기들은 무지개 플러스 원 같은 빛깔을 뿜어내며 독자를 유혹한다. 그렇게 작가의 신작 소설집에는 온통 죽음과 트라우마의 페이소스 냄새가 묻어난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가족 특히 아버지와의 고질적 불화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주가드(Jugaad;즉흥적 창의력) 같은 혁신적인 방법으로도 탈출할 수 없는 구조적 모순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그런데 묘하게 공감대가 만들어지니 그것도 신기하다. 전작 <바벨>에 비해 구름에서 내려와 지상에 안착했다고 해야 할까. <바벨>이 무언가 뜬구름 잡는 그런 작품이었다면 이번 소설집은 삶의 다양한 방식에 여러 가지 단상을 담은 무척이나 구체적인 그런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채널을 돌릴 때마다 텔레비전 스크린에 등장하는 오감을 자극하는 그런 막장드라마보다 훨씬 더 현실감 넘치면서도 주변의 누군가에게 당장이라도 일어날 법한 그런 이야기들이 책장을 넘기는 손길을 분주하게 만든다.

 

나머지 이야기들은 이번 주말 독서모임에서 더 들어봐야겠다. 언제나 그렇듯, 다른 이들과 독서체험을 공유하는 것은 책읽기의 또다른 즐거움이다.

 

[리딩데이트] 20151017~18일 오후 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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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5-11-15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잘생긴 리뷰! 알라딘 정기 메일에 님 리뷰가 뜨기에 부리나케 달려왔습니다 ㅋ
나도 곧 올려야징! >ㅅ < (그나저나 좋아요`가 안 눌러져서 슬픔 ㅠ ㅜ 에러 뜨네요)

레삭매냐 2015-11-16 11:54   좋아요 0 | URL
북플에 가입하셔야 하는 게 아닌가요?
램프의 요정에서 보니 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