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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의 달 ㅣ 런던의 강들 시리즈
벤 아아로노비치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이번 추석 연휴 때, 아주 흥미롭고 재밌는 소설 한 편을 읽었다. 사실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월척이 얻어걸렸다고 해야 할까. 소설 제목에 등장하는 소호는 몇 번 가본 뉴욕에 있는 줄 알았는데 영국 런던이 원조인 모양이다. 때마침 추석 즈음해서 슈퍼문 구경도 한 차라 더 기분이 오묘했다.
우선 벤 아아로노비치는 영국 출신의 작가로 드라마 <닥터후>의 시나리오 작가란다. 사실 <닥터후>를 알지 못하니 패스, 그리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서서 <런던의 강들>을 시작으로 해서 마법사 도제/경찰관 피터 그랜트가 등장하는 일련의 소설들을 발표하고 있다. 순서가 뒤바끼긴 했지만, 이번 주에 <소호의 달>을 너무 재밌게 보고 나서 바로 전작인 <런던의 강들>을 구해서 읽고 있다. 모름지기 소설 작가라면 독자로 하여금 이 정도 액션을 취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지금 부지런히 <런던의 강들>을 읽고 있어서, 영국 출신 재즈맨 아버지와 시에라리온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주인공 피터 그랜트(자신을 자꾸만 유색인종이라 해서 그 배경을 알 수가 없었다)가 전작에서 어떤 끔찍한 흑마술(디시뮬로)과 전쟁을 치러야 했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 후유증으로 2년 간의 순경 시절을 함께 했던 동료이자 어쩌면 썸타는 관계였을 지도 모를 레슬리 메이가 고통받고 있는 현실에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전작에서 어떻게 해서 피터 그랜트가 해가 갈수록 젊어지는 토머스 나이팅게일 경감의 마법사 경찰 도제가 되었는지 그리고 동시에 진행되는 사건 경과와 더불어 자세하게 기술된 바 있다. 보통 10년 정도 걸린다는 도제 기간을 이 뛰어난 능력의 젊은이가 과연 얼마 만에 끝내게 될지도 자못 궁금하다. <소호의 달>에서도 여전히 룩스, 임펠로 그리고 스킨데레 정도의 마법 기술 시전능력을 깨우쳤으니 갈 길이 멀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피턴 그랜트는 영국 수도경찰국 경찰로 활동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다.
전작과의 관계는 이 정도로 마치고,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어떤 사건이 다루어지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전작에도 잠시 등장했지만, 탁투스 디스비타이(반생명)인 재즈 뱀파이어와 소름 끼칠 정도로 잔혹한 키메라 혹은 바기나 덴타타라 불리는 연쇄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전작에서도 지난 30년 간 비공식 헤로인 중독자로 살아온 재즈 연주자 리처드 ‘로드’ 그랜트(피터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종종 등장하곤 했었는데, <소호의 달>에서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더 자주 등장한다. 사실 재즈에 대해 잘 안다면 혹 할지도 모르겠지만, 재즈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인지라 역자의 주석이 없었다면 팻츠 나바로, 빌리 홀리데이 그리고 찰리 파커 같은 명사와 관련된 나같이 평범한 독자가 어떻게 알겠는가 말이다. 소설의 전개나 캐릭터 같은 문제는 번역서를 읽어도 문제가 없지만, 사건의 배경이 되는 소호의 다양한 디저트 카페나 퍼브 그리고 자잘한 식당 같은 이모저모나 재즈의 이런 디테일을 모른다면 어쩌면 작가가 의도한 이야기를 100%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어쨌든 희생자에게서 베스티기아(물리적 존재에 각인된 마법의 흔적, 피터 그랜트가 어떻게 해서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를 읽어낼 줄 아는 능력을 피터 그랜트는 전작에서 총상을 입어 부상에서 회복 중인 상관 나이팅게일 경감을 대신해서 일당백의 활약을 펼친다. 초보에서 진짜 주인공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흑마술의 희생자가 되어 브라이틀링의 집에서 칩거 중인 레슬리 메이도 자료 조사라는 특기를 발휘해서 주인공을 돕는다. 첫 번째 사이러스 윌킨슨이라는 색소폰 연주자에게서 바로 이 희미한 베스티기아를 발견하면서 발전하는 마법사 도제의 본능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유능한 경찰이라면 모름지기, 희생자의 주변부터 조사해야 하는 법! 피터 그랜트는 죽은 윌킨슨의 집에 들렀다가 육감적인 미모의 여자친구 시몬 피츠윌리엄과 조우하게 된다. 전작에서도 어머니 템즈의 딸 비버리 브록과 썸을 타기도 했던 주인공은 이번 편에서는 아주 대놓고 연애에 나설 모양이다.
뛰어난 재능의 건강한 재즈맨들이 이유 없이 죽어 나가는 상황과 ‘혼인용 연장’을 뜯긴 사내들을 사냥하는 바기나 덴타타 간의 상호 연관관계를 짚어 나가던 피터 그랜트는 이제는 마법이 모두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해온 현대 영국의 흑마술사의 제자들이 존재하면서 일단의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가정을 세우게 된다. 자신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시몬과 격렬한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제 막 배운 마법 기술들을 동원해서 키메라의 습격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등의 위기탈출의 순간도 연달아 등장한다.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터지는 와중에서도, 나이팅게일 경감은 도제의 라틴어 연습과 각종 마법 기술을 훈련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끊임없는 연습과 훈련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하는 격랑의 시대를 헤쳐나온 구시대 꼰대의 표상이라고나 할까.
벤 아아로노비치는 드라마 작가답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방법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 같다. 일단 마법사 경찰이라는 소재부터 흥미를 끌어당기지 않나. 현대과학 맹신의 시대에 마법이라니! 하지만 세상 일이라는 것이 언제나 그렇듯, 말끔하게 해결되는 법이 있었던가. 그러니 이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마법과 흑마술이 빈틈을 헤집고 세상의 빛으로 탈출해 나오는 장면도 어쩌면 낯설지 않을 것 같다.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제작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는데, 현란한 미국 드라마와 달리 좀 진중하면서도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는 영국식 드라마는 또 어떨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전작에 비해 재즈라는 매혹적인 요소와 풍부하게 가미된 성적인 요소로 훨씬 재밌어지긴 한 것 같다. 2011년에 <런던의 강들>과 <소호의 달>이 나온 이래 <언더그라운드의 속삭임>과 <브로큰 홈즈>가 연달아 발표됐는데, 올해 11월에도 시리즈 신작이 발표될 예정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이번 <소호의 달>의 흑마술사는 피터 그랜트가 쫓는 희미한 베스티기아의 흔적만 남겨 놓았을 뿐이다.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지만 도대체 1945년 1월의 에터스부르크에서 어떤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서도 벤 아아로노비치 작가는 궁금증만 증폭키시고 있다. 앞으로 아아로노비치의 이야기 보따리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술술 풀려나올지 그의 팬이 된 초보 독자는 그저 기다릴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