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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ㅣ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이동윤 옮김 / 검은숲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한집 사는 사람이 나에게 경고했었다. 너무 추리소설 혹은 형사물에 빠지지 말라고. 그 경고를 사뿐하게 무시했던 나는 요즘 잠이 부족해서 너무 피곤하다.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주범은 바로 87분서 시리즈의 작가 에드 맥베인이다. 이제 고인이 된 늙다리 작가의 책을 신나게 뒤적여서 뭐하냐고? 한 번이라도 에드 맥베인의 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런 말은 하지 않겠지. 50편을 훌쩍 넘는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 중에서 이제 꼴랑 두 권을 읽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그의 매력에 흠뻑 빠지기엔 말이다.
지난 주에 읽은 소품 격에 해당하는 <조각맞추기>에 비해 중기 걸작으로 치는 <아이스>는 일단 분량에서부터 내가 읽은 전작을 압도한다. 두툼하다. <조각맞추기>는 피니스 아프리카에라는 신생출판사에서 나왔었는데, <아이스>는 시공사 임프린트에서 나왔다. 아마 판권이 여러 개로 갈린 모양이다. 시리즈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경찰혐오자>는 아마 민음사에서 나왔지. 암튼, 소설 <아이스>의 시작은 아이솔라 시에서 벌어지는 정체 불명의 사건으로부터 비롯된다. 샐리 앤더슨이라는 예쁘장한 무용수 아가씨가 괴한의 총격을 맞고 죽는다.
그리고 작가는 무대의 카메라를 바로 온갖 사건 사고로 들끓는 87분서로 돌린다. 스티브 카렐라와 마이어 마이어 콤비를 비롯해서 아서 브라운과 버트 클링 등 시리즈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형사들이 줄지어 등장해서 제 각각 임무를 맡고 조무래기 마약상 살해건까지 더해 미스터리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하드보일드 소설의 전통을 잇는 소설답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전개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분명 카렐라 형사가 주인공이지만 에드 맥베인은 치우침 없이 캐릭터에게 균등한 역할을 부여한다. 이걸 균형감이라고 부르던가. 멋지다.
일견 단순해 보이던 두 별 건의 사건은 용의자가 같은 총으로 피해자를 쐈다는 점에서 한 방에 훅 달아오르는 긴장감을 조성한다. 한 명의 범인이 저지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카렐라 형사와 그의 동료 마이어 마이어 형사는 피해자 주변에 대한 탐문 수사를 시작한다. 역시나 정석대로다. 다만, 그 정도로는 쉽게 문제 해결에 도달할 수가 없겠지. 그들이 탐문 수사의 영역을 넓힐수록 용의자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누가 봐도 빤한 거짓말을 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고, 혹은 자신이 숨기고 싶은 관계가 드러날까봐 두려워하는 인간 군상의 심리를 작가는 예리하게 짚어낸다. 하나 같이 그들이 하는 말 중의 하나는 경미한 범법을 저질렀을 진 몰라도, ‘내가 죽이진 않았다’란다. 항상 그렇듯 아둔한 독자는 이게 뭐야, 다 범인들 같은데. 다만 그놈의 동기를 찾을 수가 없다. 작가가 마련해둔 비장의 동기와 사연은 언제나 독자의 예상을 비웃는다.
밸런타인 데이 즈음해서 전개되는 미궁에 빠진 사건은 주인공 카렐라 형사가 사랑하는 아내 테디에게 그럴싸한 선물조차 제 때 못사게 만든다. 게다가 분서장인 피트 번즈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사건을 해결하라고 형사들을 쉴 새 없이 들볶고, 아이솔라 시를 번잡하게 만드는 사건 사고는 끊일 줄 모른다. 오쟁이진 아내 때문에 동료 형사들의 걱정 근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버트 클링 역시 주목할 캐릭터다. 그와 동료 형사 아일린 버크 사이에 전개되는 달달한 케미는 삭막한 형사물에 생기를 불어 넣어 준다. 그렇지, 강력 범죄에 시달리는 형사들이라고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그들도 우리네처럼 부부싸움과 온갖 잡다한 문제들로 골머리를 앓겠지.
500쪽이 넘는 페이지를 차근차근 넘길수록 에드 맥베인은 독자를 한 단계씩 범인의 곁으로 인도해 간다. 뭐 다 알다시피, 소설의 범인인 등장인물 중의 하나다. 맨날 하는 말이지만, 그렇지 않은 추리 범죄물도 있었던가. 빼어난 작가라면 예의 공식 안에서 어떻게 하면 범인이 누굴까라는 호기심과 긴장감을 마지막 페이지가 다 넘어가기 전까지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면서, 독자를 애달프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강호의 고수가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도 단언컨대 <아이스>의 저자 에드 맥베인은 상고수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핸드폰이나 컴퓨터 같은 첨단 장비가 없더라도 우리 87분서 소속 경찰들은 출중한 감과 현장에서 익힌 노련미로 잘만 범인을 검거해왔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첨단 기술의 발전은 범인 검거에도 도움을 주지만, 그 반대로 완전 범죄의 가능성을 더 높이는데도 기여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듯, 빛이 있으면 반대로 어둠도 있는 법이지.
단순한 살인사건에서 출발한 <아이스>는 뮤지컬 업계에서 통용되는 <아이스>라는 ‘하우스 시트’로 배정된 표빼돌리기 기법에서 마침내 콜롬비아 산 코카인까지 나오는 블록버스터급으로 급성장한다. 아마 당시 미국 사회에 처음 코카인이 처음 소개되고 있던 시기였는지 작가는 콜롬비아 산 코카나무에서 채취한 코카인이 어떻게 희석되어 소비자의 손에 들어오는지 소설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보너스로 이 마약이 어떤 다양한 별명으로 불리는지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형사간의 달달한 로맨스에, 조무래기 마약 딜러를 대체하려는 잡범 그리고 치정에 얽힌 복수극까지 그야말로 보여줄 수 있는 건 총동원돼서 다채로운 재미를 제공한다. 물론 마지막까지 결말을 알 수 없는 예측불허의 사건 전개 또한 일품이다.
아무래도 나의 에드 맥베인 탐닉 속도가 그의 다른 87분서 시리즈 출간 속도를 앞지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러다가 기존에 출간된 시리즈를 모두 읽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어젯밤에 <아이스>를 다 읽고, 미리 준비해둔 <킹의 몸값>을 벌써 1/3이나 읽었다. 이 가을의 마지막은 에드 맥베인과 함께 하는구나. 쉽고 재밌게 읽히는 책이 선(善)이라면 에드 맥베인의 <아이스>는 상고수가 시전한 최선의 한 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