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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화차 [火車]
생전에 악행을 저지른 망자를 태워 지옥으로 실어나르는 불수레
- 악인이 한 번 타면 절대로 내리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는 불수레 (나꼽살 주석)
정말 오래간만에 리뷰를 쓴다. 그동안 악마의 게임에 빠져 리뷰질에 소홀했었다. 여전히 헤어나진 못하고 있지만, 이번 주말에 있을 독서 모임을 위해 꾸역꾸역 <화차>를 읽었다. 이 기세로 한 달째 손에 내려놓지 못하고 있던 오 헨리 단편선도 마무리 지어야지 싶다. 게임 때문에 빠졌던 독서 슬럼프에서 이제 기지개를 켤 시간인가 보다.
각설하고 오늘의 주제인 미야베 미유키, 다들 미미여사의 최고 걸작이라고 불린다는 <화차>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처음 출간된 지 20년 만에 새롭게 단장해서 독자를 찾아온 “전설의 베스트셀러”는 아무래도 20년이라는 시차 때문인지 아니면 일본 문학에 대한 개인적 편견 때문인지 읽는 내내 심드렁했다. 최근에 변영주 감독 연출로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화차> 그리고 즐겨듣는 팟캐스트 방송에서 언급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읽게 만든 추동력이 아니었을까.
언뜻 어느 라디오 PD가 이 책의 키워드를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허상 같은 행복추구(pursuit of happiness)로 규정했던 리뷰가 떠오른다. 이미 십 년 전인 2003년 카드대란을 직접 체험한 세대여서 그런지, 돌고 도는 운명의 불수레에 거침없이 올라탄 주인공 세키네 쇼코 아니 신조 교코에 동정심이 앞선다. 결혼을 앞둔 한 남자가 자신의 약혼녀가 개인파산자라는 사실을 알고, 그 사실을 그녀에게 추궁하자 여자는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졸지에 약혼녀를 잃고, 막막해진 약혼남은 사고로 마침 휴직 중이던 사촌 혼마 슌스케 형사에게 자신의 약혼녀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42세로 교통사고로 아내 지즈코를 잃고 홀로 아들 사토루를 키우던 혼마는 그렇게 사건에 뛰어들게 된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사회파 미스터리를 떠올리는 1980년대 말 일본 버블 경제의 붕괴 이후, 사회를 휩쓸던 신용대출, 개인파산이라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미미여사는 전면에 배치한다. 아울러 실종된 묘령의 여인을 찾는 과정에서 헤진 속살을 조금씩 드러내는 한편,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심층적 분석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소설 속에서 혼마 본인도...
여기까지 리뷰를 쓰다 말고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아마 왜 그렇게 혼마가 세키네 쇼코를 추적하는 일에 매달렸을까 하는 심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나 보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렇게 중요한 포인트가 아닌 듯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리뷰를 마저 쓰지 못하고 참석한 독서모임에서 소설, 드라마 그리고 영화에까지 이르는 방대한 이야기에 취했었다. 책읽기가 개인적 체험이라면, 책을 읽고 나서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독서모임은 개인적 독서의 외연 확대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소설과 일본 드라마 그리고 각색을 통한 재창조라는 평을 듣는 변영주판 <화차>의 차이점을 비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각각의 장르에서 보여주는 소재의 변주(variation)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독서 모임에서 지인은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로 쇼코의 어릴 적 친구 다모쓰의 아내 이쿠미를 지목했다. 현재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여자로서 질투심을 무릅쓰고, 쇼코의 행적을 찾겠다는 남편을 보내야 하는 심정이 참 절절하다고 했던가. 개인적으로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사라져 버린 구리사카 가즈야가 가장 안됐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정작 사건의 발단을 제공해준 사람이 소설의 어느 부분에선가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최초의 의뢰가 실종되어 버리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가즈야가 나중에라도 모종의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은 그야말로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소설 <화차>에서 미미여사는 개인의 문제에서, 사회의 문제로 그리고 다시 개인의 문제로, 새로운 단서를 제공하는 결정적 인물의 등장,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그야말로 돌고 도는 윤회적 구성으로 긴장의 끈을 바짝 조이는데 성공한다. 이런 소설의 흥미진진한 전개에 비한다면, 결말은 다소 아쉽기까지 하다. 스릴러의 특성상, 개연성의 개입은 어쩔 수가 없겠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너무 자주 필연 대신 우연(偶然)이 미리 결말의 김을 뺀 게 아닌가 싶다.
소설 <화차>가 담보하는 많은 담론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맡겨야할 것 같다. 특히, 신용카드의 무분별한 사용에 따른 개인의 책임과 그런 환경을 제공한 사회 혹은 기업의 책임에 대해서는 좀 더 진지한 논의가 뒤따라야할 것 같다. 다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적 행복의 추구는 반대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십 년 전에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화차>는 너무 늦게 도착한 것 같다.
[뱀다리] 영화 개봉에 맞춘 재출간 타이밍은 정말 최고였다. 가히 시너지 효과에 준거한 쌍끌이 흥행이라고 부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