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눈 프리키는 알고 있다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54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부희령 옮김 / 비룡소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올해 처음 만난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의 <초록 눈 프리키는 알고 있다>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한다. 반세기를 훌쩍 뛰어 넘는 필력을 가진 저자이지만, 청소년 문학으로 분류되는 이 작품에서도 그녀의 화려한 문학적 아우라를 엿볼 수가 있었다.

 

소설은 첫 페이지에서 ‘경계’를 넘는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언제나 그렇듯, 경계를 뛰어넘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다. 십대소녀 프랭키(프란체스카) 피어슨은 이 매력적인 소설의 주인공으로, 자신이 어떻게 해서 ‘초록 눈 프리키’를 만나게 되었는지 담담한 어조로 독자에게 설명한다. 전직 미식축구 선수이자 저명한 스포츠 해설가인 셀러브리티 아버지를 둔 프랭키의 가정은 완벽해 보인다. 잘나가는 가장에, 예술 활동을 취미로 삼은 아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미식축구 선수인 오빠 토드 그리고 두 명의 귀여운 딸내미들.

 

그런데 진짜 이야기는 이제 시작된다. 작가는 미국 교외에 사는 중산층 가정의 구성원인 어느 십대 소녀의 눈에 비친 결혼생활에 방점을 찍는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겉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그네들의 삶의 본질을 파고든다. 한 꺼풀 들추고 보면, 아버지 리드는 전형적인 마초로 완벽한 가정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 자신의 가정을 위협하는 요인은 아예 싹부터 잘라 버려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나이다. 자신의 결혼생활을 방해하는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숨어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삶의 균열은 아내로 자신을 곁에서 보좌해야 할 임무를 가진 크리스타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 아내를 잃고 두 번째로 맞은 아내 크리스타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리드의 입장이 애처롭게 하나씩 차례로 소개된다. 대학생이 되어 가정 밖에 머무르는 오빠 토드야 그렇다치고, 한참 예민한 사춘기 소녀 프랭키는 궤도에서 탈선한 채 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부모의 불화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독립된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액세서리처럼 생각하는 리드를 견딜 수 없었던 크리스타는 결국 별거를 감행한다. 더 이상 스테이플러로 박아 넣은 미소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속물적인 시애틀 교외의 삶에 천착하던 프랭키는 필사적으로 부모의 별거를 감추려고 노력한다. 리드의 폭언과 폭력을 참지 못하고 스카짓 하버로 거처로 옮긴 크리스타는 새로운 곳에서 제2의 인생을 맞이한다. 그런 그녀와는 달리, 주인공 프랭키는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자신만을 생각하고 아버지 리드, 자신과 그리고 어린 동생 사만다를 버린 엄마 크리스타를 용서할 수가 없다. 그에 비하면 아버지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또 사우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이런 비틀린 애정이 <초록 눈 프리키는 알고 있다>의 비극의 씨앗으로 작동한다.

 

가정의 행복에 대한 격언처럼 알려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인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모든 가정이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지점이 요원하기만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완벽한 가정의 해부를 통해 미국 사회의 실체를 살짝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원하는 행복이라는 가치가 가족의 구성원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소통이 중요하지만, 그 소통을 위해서 변화와 실천을 할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나의 생각을 타인에게 주입시키려는 리드의 과욕이 모든 사달의 발단이 아니었던가.

 

조이스 캐럴 오츠가 정교하게 기술한 부모 간의 역학관계도 눈여겨볼 관전 포인트다. 왜 크리스타는 진작 리드의 폭력에 전문가나 지인의 도움을 오청하지 않았을까. 사후약방문식의 처방이 아니라, 뼈아프지만 문제의 근본을 드러내고 해결에 나섰다면 그런 비극의 주인공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미국 가정 내 만연한 폭력의 실체를 보는 것 같아 오싹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크리스타의 리드에 대한 애증도 빼놓을 수 없다. 사랑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비극이 그녀의 애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아주 작은 단서조차 흘릴 수 없는 조이스 캐럴 오츠의 미국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가족에 대한 심리 스릴러 <초록 눈의 프리키는 알고 있다>는 의외의 수확이었다. 민음사의 청소년문학 임프린트인 비룡소 “블루 픽션” 시리즈로 출간돼서 여느 청소년 소설이겠지 하는 나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십대 소녀의 이메일, 법정 진술 그리고 크리스타의 비밀 일기 등은 <초록 눈의 프리키는 알고 있다>의 구성을 풍부하게 해주는 다양한 요소들이다. 다양한 매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대가의 솜씨는 역시 기대이상이었다. 지난봄에 읽은 <블론드>가 대작이었다면, 이번에 읽은 <초록 눈의 프리키는 알고 있다>는 소품으로 조이스 캐럴 오츠의 문학세계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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