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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 김경욱 소설집
김경욱 지음 / 창비 / 2011년 9월
평점 :
일전의 어느 자리에서 책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는 말을 들었다. 보통 리뷰는 책을 읽고 나서 바로 쓰는 편인데 지난 주말에 이러저러한 일로 바빠서 리뷰 쓰는데 며칠이 걸렸다. 모두 9편의 이야기 중에서 마지막을 장식한 <아버지의 부엌>에 나오는 에피소드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어느 학생 꼬마처럼 시험 잘 보면 무엇이든 사주겠다고 약속한 아버지에게 턱도 없이 “미미의 부엌”을 사달라고 했다가 장난감 기관총을 받는다. 너무 “미미의 부엌”이 갖고 싶었던 나는 결국 동생의 돼지저금통에 손을 댔다가 전봇대에 호스로 묶인다. 정말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에 대한 묘사는 내내 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몇 년 전에 <위험한 독서>로 김경욱 작가를 처음 만났다. 아마 처음으로 내가 읽은 책의 저자와 지근거리에서 그렇게 대화를 나누지 않았나 싶다. 서울의 어느 카페에서 진행된 <위험한 독서>에 대한 대담의 자리였지 싶다. 솔직히 김경욱 작가와 나눈 이야기보다 김경욱 작가가 우리를 위해 내준 커피 값의 추억이 더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나중에 카메라맨과 PD의 요청으로 <위험한 독서>의 독서지도사 역할을 어느 대학생과 연출했었다. 그래서 더 개인적으로 작가에게 친근함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나서 한참이 지나 지난달 끄트머리에 김경욱 작가의 신작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를 만났다. 다 읽고 난 나의 소감은 한 마디로 다음과 같다. 명불허전(名不虛傳). 김경욱 작가의 단편 실력은 이미 알고 있기에, 장편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소설집을 만난 기분이라고나 할까. 다시 만난 지기 같은 기분에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분주해졌다.
도시의 수백 개의 계량기가 동파된 어느 추운 겨울날 벌어진 사건을 재구성한 타이틀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에서는 <도가니>의 잔향이 느껴지기도 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악행에 대한 심판은 온전하게 신에게 맡겨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일본만화 <내일은 조>를 연상시키는 <허리케인 조의 파란만장한 삶>에서는 타인의 삶을 반추하는 자서전을 대필하는 글쟁이의 시선으로 몰락한 권투선수를 바라본다. 한 때, 각광받는 스포츠였지만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우리네 관심에서 멀어져간 권투 경기와 계체량 통과라는 가히 살인적인 자신과의 투쟁이 오롯하게 그려진다.
<연애의 여왕>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다. 내는 책마다 족족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는 은둔형 얼굴없는 작가 “연애소설의 여왕”을 찾아 나서는 사진작가의 밀착취재가 그 중심이다. 모두가 알고 싶어 하지만, 도대체 알 수 없었던 미지의 인물을 찾아가는 미스터리 형식의 구성이 인상적이다. 누가 봐도 빤한 상업소설이지만, 잘 팔린다는 이유로 궁금해 하는 설정은 문학의 소비가 과연 긍정적인가 하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연애의 여왕이 잘 팔리지 않는 작가였다면 그 누가 그녀에게 관심을 두었겠는가 말이다. 게임이 법칙이 지배하는 문학계에 대한 풍자를 슬쩍 내비치는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가 가출하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할아버지에, 야간경비 일을 하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희망 없는 88만원 세대의 초상을 그린 <태양이 뜨지 않는 나라>도 주목할 만하다. 누구나 꿈꾸는 행복이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절대 허락되지 않은 금기의 단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쑥 떠오른다. 허구한 날 꽁치찌개를 끓이는 아버지에게는 담배를, 텔레비전을 끼고 사는 할아버지에게는 소주에 빨대를 꽂아 드리는 주유소 비정규직 알바 청년의 신산한 삶에 대한 초상이 마치 허상처럼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정답을 아주 좋아한다. 아니 꼭 정답이 아니더라도 정답에 가까운 근사치만으로도 만족한다. 그런데 김경욱 작가는 나 같은 독자에게 그런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정말 다양한 삶의 군상을 죽 나열해준다. 이런 삶도 있단 말인가 하는 질문은 스스로에게 삶의 방향타를 다른 방향으로 수정하라는 말로 다가선다. <위험한 독서>를 읽으면서도 느낀 점이지만, 그의 소설에는 정답이 없다. 하긴 변화무쌍한 삶의 여로에서 정답을 찾겠다는 생각 자체가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에서 김경욱 작가가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때로는 공감하고, 분노하고, 연민을 느끼고, 그땐 그랬지를 속으로 연발했다. 깊어가는 가을에 부담 없이 읽기에 참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