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다른 곳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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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신문의 칼럼에서 많은 작품을 발표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초기작, 대표작 그리고 최근작을 읽는 것이 첩경이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거의 반세기 동안 꾸준하게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왔다. 위의 공식에 요사 선생의 작품 세계를 대입해 보면, 초기작으로는 <녹색의 집>, 대표작으로는 <세상 종말 전쟁>과 <염소의 축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근작으로 바로 이제부터 소개할 <천국은 다른 곳에>를 꼽을 수가 있겠다.

우선 그동안 꾸준하게 우리나라에 소개되어왔지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더불어 남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면서도 대중적인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미출간 작품들이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해서 다투어 소개되고 있다. 물론 그의 팬으로서 반가운 소식이다. <천국은 다른 곳에>가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국내에서 가장 빨리 요사 선생의 신간으로 출간되었기에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바로 주문 클릭을 눌렀다.

전작 <염소의 축제>에서 선보였던 서로 다른 층위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스토리텔링에 플래시백을 추가한 서사 구조는 <천국은 다른 곳에>서 단순해졌지만, 더욱 정교해진 형식으로 집중력을 높였다. 리얼리즘과 허구(픽션)의 조화 역시 인상적이었다.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한 ‘평전 소설’의 재미와 감칠맛은 여전하다. 아마 번역을 맡은 역자 김현철 씨의 문학적 체화가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이번에 요사 선생의 부름을 받은 역사 인물은 바로 19세기 중엽, 여성해방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을 통해 인류의 구원을 제창했던 플로라 트리스탄과 그녀의 외손자로 화성(畵聖)으로 추앙받는 고흐와 프랑스 남부의 아를에서 한 때 이상적 예술 공동체를 꿈꾸다가 야만과 원시 그대로의 예술혼을 불사르기 위해 폴리네시아 타히티로 갔던 외젠 앙리 폴 “코케” 고갱이다.

<염소의 축제>에 주인공 중의 한 명으로 등장한 상원의원의 딸이자 미국에서 교육받은 엘리트 여성의 한계에 대한 비평을 의식한 탓일까?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전작에 등장한 여자 주인공의 캐릭터에서 한참 앞서나간 여성운동가 플로라 트리스탄을 <천국은 다른 곳에>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19세기 중반 급격한 산업화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한 플로라는 노동자와 여성의 연대를 통한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던진다. 부르주아 계급의 귀부인을 “아리따운 기생충”이라고 부르며 플로라는 인류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경찰과 종교계의 지속적인 탄압에도 프랑스 전역을 순례하면서 <노동조합> 설립을 통한 노동자/여성의 권익 신장과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자고 주장한다. 작가는 1844년이라는 플로라의 인생 마지막 해의 강렬했던 투쟁에, 신산한 개인의 삶을 플래시백으로 다루고 있다.

여자 메시아 플로라 트리스탄의 이야기가 <천국은 다른 곳에>의 한 축이라고 한다면 그녀의 외손자로 전 세계를 누비던 선원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유능한 주식 중개인에서 중년에 전업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폴 ‘코케’ 고갱이 다른 한 축을 맡고 있다. <천국은 다른 곳에>는 이렇게 플로라 트리스탄과 폴 고갱에 대한 교차 서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별개의 소설로 읽더라도 무난한 정도의 개별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정치과 예술이라는 서로 다른 장르에서 나름대로 ‘천국’을 지향했던 인물을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상상력이라는 물감으로 재창조해낸 문학적 초상화다.

플로라와 코케 모두 어쩌면 자신이 편입되어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었던 부르주아 계급의 허위와 위선을 배격하고, 각각의 분야에서 냉정과 열정을 오가는 치열한 삶을 살았던 캐릭터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 에릭 홉스봄의 원서강독을 하면서 들었던 공상적 사회주의자 생시몽-푸리에-프루동의 이름이 먼지 쌓인 기억의 창고에서 주술처럼 그렇게 소환됐다. 샤를 푸리에와 로버트 오언의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사유재산제의 부정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플로라는 기존의 결혼제도를 여성의 남성에 대한 구조적인 종속이라는 악의 근원으로 보고, 완벽한 남녀평등을 주창한다. 당시 산업화 과정에서 빚어진 착취와 불평등이라는 시대모순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리고 그에 따른 행동과 실천이라는 서사적 논거를 한때 사회주의자였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양심은 정확하게 짚어낸다.

플로라 트리스탄의 삶이 냉정함을 담보한다면, 그 대척점에는 열정의 사나이 폴 고갱이 서 있다. 고갱의 파트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미친 네덜란드 놈”에 대한 언급에서는 이 화성에 대한 애증과 그의 죽음에 대한 고갱의 죄의식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갱의 할머니 플로라가 이상적 공동사회에 대한 꿈을 꿨다면, 고갱은 예술 공동체로서의 아르카디아(Arcadia)의 건설을 희망했다. 하지만, 화성은 정신병으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고, 고갱은 야성과 문명을 허물기 위해 폴리네시아의 타히티로 또 더 나아가 마르키즈 제도에까지 도달했지만 끝내 자본에 종속된 화가의 숙명(마몬 신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한편, 기독교 문명인의 허울을 벗고 스스로 야만인/이방인이 되고자 한 고갱의 모습에서 1990년대 초반 페루 대선에서 후지모리에게 패한 후, 조국 페루를 떠나 스페인 국적을 취득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얼터 이고(alter ego)가 읽혔다.

<천국은 다른 곳에>는 과거 역사 서술의 ‘마스터’라고 할 수 있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후기 작품세계의 걸작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정치와 예술의 변증법적 결합을 통해 ‘천국’이라는 이상향을 모색한 거장의 문향에 그만 흠뻑 취해 버리고 말았다. 이제 <세상 종말 전쟁>에 도전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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