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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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책으로 접할 수가 있었다. 사실 올 연초에 이번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출간된 제인 오스틴의 <설득>을 텔레비전 영화로 먼저 봤다. 그동안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인 오스틴의 작품 세계를 간접 체험했지만, 정작 원작으로는 만나볼 기회가 없었다. <설득>은 42세의 이른 나이에 타개한 제인 오스틴이 이 세상에 남긴 모두 6편 소설 중의 마지막 작품이다.

<설득>의 내용은 그녀의 문체만큼이나 간단하다. 준남작 가문인 엘리엇 가의 둘째 딸인 앤 엘리엇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앤은 올해 27살의 노처녀다. 외모와 사회적 지위에 무척이나 신경을 쓰는 아버지 월터 경과 언니 엘리자베스는 기울어 가는 가세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평판에 더 신경을 쓰고,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낭비한다. 현실에 입각한 앤의 부채 상환 계획은 무시되고, 결국 그들의 영지가 있는 켈린치 홀을 어쩔 수 없이 크로프트 제독 내외에게 세를 내준다.

지금까지가 엘리엇 가문을 덮친 경제적 위기였다면 이제부터는 제인 오스틴의 장기인 남녀 간의 로맨스가 등장한다. 앤의 마음을 뒤흔든 사나이는 바로 8년 전에 그녀에게 청혼했던 프레더릭 웬트워스 대령이다. 그 당시만 해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고, 사회적 지위마저 불안정했던 웬트워스의 청혼을 앤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죽은 어머니의 친구 레이디 러셀의 ‘설득’으로 그만 거절하고 만다.

전 유럽을 뒤흔들었던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해군으로 사회적 지위와 재산까지 얻은 웬트워스 대령은 딸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탐을 낼만한 그런 일등 사윗감으로 급부상한다. 그런 웬트워스는 앤을 냉담하게 대하면서, 오히려 앤의 여동생인 메리의 시누이 자매에게 호감을 표시한다. 영국의 전원인 서머싯셔의 켈린치 홀, 어퍼크로스, 바스와 라임을 오가며 벌어지는 청춘남녀들의 알콩달콩하면서도 잔잔한 로맨스가 제인 오스틴의 손끝을 통해 재탄생한다.

19세기 초,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전 세계를 주름잡던 영국은 조지 3세의 통치 아래 미국 독립전쟁을 비롯한 가장 강력한 맞수 프랑스와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소설에 명백하게 등장하는 1814년이라는 시대 상황은 영국과 러시아가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제국에 승리를 거두고, 전쟁에 이긴 군인의 귀향이 이루어지던 시기다. 남자들에게 전쟁은 사회적 신분상승과 상당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기회다. 이런 정치사회적 이슈를 제인 오스틴은 여성 특유의 필치로 예민하게 짚어낸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를 맞은 전쟁 영웅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불안한 현재를 마감하고 안락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한다. 다시 말해서, 결혼시장이 분주해졌다는 말일 게다.

제인 오스틴은 바로 이 전쟁을 통해 성공한 남자의 모델로 프레더릭 웬트워스 대령을 남자 주인공으로 낙점한다. 그의 상대역으로 시골 마을에서 조용하게 사교 활동을 하고, 책을 읽는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 앤 엘리엇을 골랐다. 물론 소설의 극적 긴장감과 재미를 위해 주변에 앤과 프레더릭에 못 미치는 캐릭터들과 음모를 꾸미는 악당 역도 빼놓지 않는다. 그 반대편에는 스미스 부인, 하빌 대령과 벤윅 대령 같은 온건하면서도 따뜻한 감성을 가진 조연을 배치한다. 월터 경과 앤의 언니 엘리자베스로 대변되는 구세대의 인물에 대한 웬트워스라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보이지 않는 경멸을 제인 오스틴은 소설의 곳곳에 은근하게 표시한다.

귀족이라는 신분을 내세우며 갖은 점잔을 빼며 체면을 중시하지만, 정작 한 꺼풀 벗겨 내고 보면 그네들의 허영과 가식으로 가득한 실상이 바로 드러난다. 체면을 차리기 위한 소비로 가계가 허물어져 가는데도 월터 경과 엘리자베스는 조상이 전해 준 가문의 이름에 덧씌워진 신기루를 좇는다. 그래서 앤의 우월한 존재감이 더 빛나는 걸까? 라임에서 루이자 머스그로브의 분별력 없는 행동으로 사고가 발생하자, 신속하게 사람들을 지휘해서 일을 처리하는 앤의 모습은 19세기 영국 숙녀의 전형으로 다가온다.

로맨스 소설 <설득>의 핵심은 여전히 옛사랑을 잊지 못하는 앤과 웬트워스의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아무리 시대가 지나도 만고불변의 진리인 사랑 이야기를 소설꾼은 놓치지 않는다. 제인 오스틴의 간단하면서도 흡입력 있는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짧은 대화에도 시시때때로 변하는 주인공 감정의 이입은 물론이고, 상대방의 반응에 애달파 하는 사랑의 순간들을 어쩌면 이렇게도 멋지게 그려낼 수 있는지 절로 감탄이 나올 뿐이다. 이상이 앤의 감정이라면, 젊은 시절 자존심 때문에 사랑을 잃었던 웬트워스의 질투와 늦게나마 앤의 우월함을 깨닫게 된 그의 행동을 보면서 역시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50권까지 나온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에서 유일하게 두 명의 역자가 번역을 맡아서 그런 진 몰라도, 번역이 더 매끄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제인 오스틴이 그린 이상적 행복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과연 일개 독자로 저자의 의도한 바에 얼마나 도달했는지는 자신은 없지만, 행복에 후회는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서로의 사랑은 확인한 앤과 웬트워스처럼 말이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지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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