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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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작가라는 타이틀은 참 대단하다. 1994년 그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읽기 전부터, 주눅이 들어 버렸다. 게다가 그전에 작가의 다른 책을 읽었더라면 모르겠는데, 집필 50주년을 기념해서 마치 백조의 노래를 떠올리는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읽으려니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부담감에 시달리게 됐다.

1935년생으로 일흔 살을 훨씬 넘긴 오에 겐자부로는 10살 때, 패전한 조국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일본 최고의 명문이라는 도쿄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1957년 문단에 데뷔한 오에 겐자부로는 극우파가 활개를 치는 일본 문학계에서 평화를 사랑하는 민주주의자이자 행동하는 양심적 지식인의 프로토타입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펴낸 <가면의 고백>의 미시마 유키오 같이 스스로 제 배를 째고 죽은 극우파와는 차원이 다르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의 시간적 배경은 전후 일본이다. 군국주의와 전체주의로 무장한 채, 대동아공영이라는 허울 좋은 식민제국주의를 꿈꾸던 20세기 전반의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통해 미국으로 대변되는 서양세력이 처절한 패배를 당한다. 전쟁에 지면 패전국의 남자는 보이로, 여자는 창녀가 된다고 했던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미영귀축을 외치며 1억 총옥쇄와 본토결전을 운운하던 일본 군부와 국민은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에 따라, 일본을 점령한 미군의 처분에 온순한 양처럼 따르게 된다.

오에 겐자부로의 자전적 소설은, 작가의 기존의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형식으로 전개된다. 시나리오를 위한 소설이라고나 할까. 지금은 변절한 한국의 어느 시인의 구명을 위해 단식투쟁도 불사했다고 하는데, 그 무렵에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걸작 단편소설 <미하엘 콜하스>의 일본 내 영화화라는 <M 프로젝트> 구상으로 대학시절 서먹서먹했던 친구 고모리 다마쓰와 아역 배우 출신으로 화려한 커리어의 주인공 사쿠라 오기 마거섁이 뭉치게 된다.

작가는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위해 두 개의 특별한 텍스트를 사용한다. 하나는 제목에 나오는 에드가 앨런 포의 사후에 발표된(1849년) 연시 <애너벨 리>이고, 다른 하나는 16세기 작센 지방의 말 장사였던 실존 인물 미하엘 콜하스(Michael Kohlhaas)의 생애를 그린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단편 소설이다(1811년 발표). 프로이센의 토지귀족 융커의 횡포에 분연히 저항해서 자신의 정당한 법적 권리를 되찾기 위해 저항에 나선 <미하엘 콜하스>애는 19세기 초 전 유럽을 석권했던 나폴레옹의 지배에 대한 독일 국민의 저항이라는 정치적 함의와 더불어, 미국에 패하고 나서 아무런 저항 없이 지배를 받아들인 일본 국민에 대한 이미지가 중첩되고 있었다. 작가는 과연 그런 점까지도 모두 고려를 해서 예의 <M 프로젝트>를 구상했던 걸까. 종교개혁 시대 반봉건 인물이라는 멋진 텍스트 때문에, 클라이스트의 단편 소설을 구해서 지금 읽고 있다.

<메이스케의 출진>이라는 작가의 어머니가 공연했던 연극을 시나리오로 한 영화 작업과 동시에 사쿠라 씨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에 대한 치유가 병행된다. 그녀의 보호자로 훗날 남편이 되는 데이비드 마거섁은 사쿠라 씨에게 구원자인 동시에 약탈자이다. 그녀는 자신의 은사 와타나베 선생의 죽음으로 슬럼프에 빠져 있던 작가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준다. 작가는 굉장히 객관적인 시선에서 사쿠라 씨의 과거를 조명하기 시작한다. 작가, 고모리 그리고 사쿠라 씨라는 기묘한 삼각 축은 오에 겐자부로의 새로운 스타일의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이다. 감정에 극한에 다다른 고모리는 작가에게 주먹질까지 해대지만, 그의 리치(reach)는 아쉽게도 그에 미치지 못한다. 결국, 데이비드의 죽음을 앞두고 <애너벨 리 영화> 무삭제판이라는 금기를 통해, 사쿠라 씨의 깊은 상처를 다시 헤집고 다른 차원의 치유를 향한 전진을 시작한다.

솔직히 말해서, 책을 읽으면서 오에 겐자부로가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고갱이를 나는 독자로서 제대로 짚어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굳이 브레히트의 거리두기(소격효과)를 말하지 않더라도, 반백 년 글쓰기를 생업으로 삼은 작가의 시나리오 소설은 낯설기만 했다. 작가의 전작들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던 에드가 앨런 포의 <애너벨 리>에 대한 번역이 너무 이상했다. 오에 겐자부로 작가가 일부러 그렇게 번역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중에서도 “... the bright eye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125쪽)를 “애너벨 리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보네”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애너벨 리가 아름답다는 건지 아니면 애너벨 리의 눈동자가 아름답다는 건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는 해석이 눈에 밟힌다.

오에 겐자부로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이 무엇인지 찾아보니 <만엔원년의 풋볼>이라는 작품인데, 재출간된 지 불과 3년 만에 절판이 됐다. 천하의 노벨상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팔리지 않으면 바로 절판이 되어 버리고 마는 책의 숙명이 새삼 진중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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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2-16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대로 고려원에서 출간된 <만연원년의 풋볼>은 절판되었죠. 지금은 같은 역자가 <만엔원년의 풋볼>로 웅진에서 재출간해 구해볼 수 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