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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지난 주말에 파주 헤이리에 있는 서점 북하우스에 들렀다가 안 그래도 한 번 읽어 보고 싶다고 작심을 했던 에밀 아자르, 아니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과 만났다. 마침 읽고 있던 책을 거의 다 읽었을 무렵이라 바로 살까 했지만, 자제를 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다음날 결국 사고 말았다. 아는 북메이트가 이 책을 진짜 읽을 거냐고 해서, 아니 그렇게 재미가 없었나 했지만, 그것은 정말 기우(杞憂)였다. 어젯밤에 이 책을 다 읽지 않고서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 책의 저자 에밀 아자르는 우리에게는 로맹 가리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작가의 필명이다. 어느 퇴근길에 라디오 방송에서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에 관한 에피소드를 전해 듣고 정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평생에 딱 한 번만 주어진다는 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받은 유일무이한 프랑스 작가! 문학평론가들은 모두 로맹 가리가 끝났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1975년 두 번째 공쿠르 상의 영예를 거머쥔다. 리투아니아 출신 유태인으로 태어나, 어릴 적에 프랑스로 이주해서 2차세계대전 참전용사로 그리고 전후에는 외교관으로 활발한 활동을 한 인텔리의 전형이었다.
<자기 앞의 생>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열렬한 포옹> 다음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라는 혼선을 피하기 위해, 책의 저자로 표기된 대로 앞으로 에밀 아자르로 통일하겠다. 에밀 아자르는 <자기 앞의 생>에 10살 난 고아 소년으로 추정되는 회교도 모모(모하메드)와 예순 살은 족히 먹은 유태인 로자 아줌마를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운다. 파리 외곽에 있는 19구, 20구의 벨빌(Belleville)은 오랜 노동자들의 거주지로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 책 <자기 앞의 생>은 <마담 로자>라는 제목으로 1977년에 제작되기도 했는데, 제목에 나오는 대로 로자 아줌마는 주인공 모모와 투 탑 캐릭터다. 폴란드 출신 유태인인인 로자 아줌마는 히틀러의 그 악랄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그녀는 한창이던 시절에는 ‘몸으로 벌어먹고’ 살았고, 지금은 자신의 후배들이 그렇게 낳은 아이들은 돌보며 생활을 하고 있다. 이웃의 독실한 회교도로 85세의 양탄자 장수 하밀 할아버지는 모모가 세상에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을 알려준다. 그는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빅토르 위고와 코란을 헷갈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돌보는 여러 아이 중의 하나로, 로자 아줌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사방에 똥을 싸갈긴다는 말에서 웃음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애처로움이 배어 나왔다. 모모가 이런 해괴망측한 일탈을 일삼을 때마다 그녀는 모모를 데리고 역시 유태인 의사 카츠 선생님을 찾아간다. 카츠 씨는 모모가 아니라, 로자 아줌마에게 신경안정제를 복용시킨다. 이들이 벨빌의 소란스러운 골목에서 빚어내는 불협화음에 묘한 정이 가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로자 아줌마의 건강이 점점 나빠지면서, 이별과 슬픔의 농도를 더해 가기 시작한다. 열 살배기 어린이지만, 너무 빨리 세상을 알아 버린 모모는 만약에 자신을 돌봐주는 로자 아줌마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자신은 빈민구제소로 끌려가게 되는 얄궂은 운명에 처하게 되리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흑인 꼬마 바나니아를 이용해서 좀도둑질하고, 자신의 표현대로 뚜쟁이 질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산다. 모모, 넌 정말...
그러던 어느 날, 녹음실에서 일하는 나딘 아줌마를 만나게 되고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작은 희망과 조우하게 되는 모모. 경찰, 테러리스트 혹은 포주의 꿈을 꾸는 모모는 생(生)이 15살 난 로자 아줌마를 파괴해 버렸다는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게다가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에, 설상가상으로 모모에게 닥친 “민족적 대재난”까지 눈코 뜰 새 없이 사건이 연달아 터진다. 과연 우리의 모모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어 보이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
에밀 아자르는 <자기 앞의 생>에서 우리네 삶이 행복과 즐거움만으로 가득 차 있다는 환상에 모모라는 작은 돌멩이로 파문을 일으킨다. 자신의 나이조차 모른 채, 겉늙어 보이는 외모 때문에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벨빌의 어느 거리에서 일상을 보내는 모모의 모습을 통해 에밀 아자르는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정신이라는 프랑스 대혁명의 기치 아래 다민족 국가화되고 있는 프랑스의 현실은 디스토피아처럼 다가왔다. 미성년자 보호라는 핑계로, 아이들을 옥죄고 가두려는 사회보장제도에 에밀 아자르는 냉소적인 시선을 날린다.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와 관련된 안락사는 또 다른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감동적이었던 건,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하류 이웃들이었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포주 은다 아데메, 여장남자로 세네갈에서 권투 챔피언이었다는 롤라 아줌마 그리고 카츠 선생님의 왕진을 돕기 위해 7층이나 되는 계단을 업고 오르락거리는 이웃을 작가는 합법적인 신분의 증명서를 지닌 프랑스인들과 대척점에 세우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프랑스 사회의 근저를 훑는 느낌의 너무나 다양한 인간군상의 재현에 작가가 쏟은 내공의 흔적들이 푸근하게 다가왔다.
<자기 앞의 생>에 등장하는 미묘한 주제 중의 하나인 홀로코스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프랑스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로자 아줌마에게 홀로코스트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얼마나 서구사회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악몽을 씻어 내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한 개인에 미친 엄청난 공포와 폭력의 영향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10살 아니 14살 소년의 시각으로 이런 멋진 소설을 발표한 에밀 아자르, 아니 로맹 가리의 필력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하게 됐다. 기저를 알 수 없는 소외와 외로움 그리고 죽음이라는 삼중주를 연주하면서도 이렇게 멋진 글로 세포 분열하는 프랑스 사회의 단면을 섬세하게 짚어낸 노작가 백조의 노래 같은 작품에 그저 찬탄을 보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