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스호퍼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유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여름 <골든 슬럼버>로 이사카 고타로와 첫 번째 만났다. 잘 알려지지 않은 비틀스의 동명의 곡을 제목으로 한 역작에서, 이사카 고타로 스릴러의 맛을 볼 수가 있었다. 이사카 고타로는 이번 여름에 찰리 채플린의 동명의 영화 제목 <모던 타임스>로 독자들의 안달을 유도했고, 이번 겨울에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그래스호퍼>로 다시 우리 곁을 찾아왔다.

어제 집에 가는 퇴근길에, <그래스호퍼>의 세상 속으로 점프해 들어갔다. 조금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스즈키, 구지라 그리고 세미의 순환되는 구성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세 명의 주인공 중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스즈키는 2년 전까지만 해도 아주 평범한 중학교 수학선생이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내가 데라하라라는 깡패에게 교통사고를 통해 죽게 되자, 복수를 불태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다단계 피라미드 조직인 데라하라의 프로이라인(독일어로 영애:令愛를 의미)에 복수를 위해 잠입한 스즈키는 조직원으로부터 생판 모르는 이들을 처리하라는 어처구니없는 임무를 받는다.

두 번째 주인공인 구지라(일본어로 고래를 의미한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만이 유일한 소설이라고 생각을 하는 전문 자살 유도 킬러다. 오늘도 의뢰인인 의원 출신의 가지로부터 자신의 비서를 은퇴시키기 위해, 호텔방을 찾는다. 킬러와 도스토옙스키라니! 책이 닳도록 <죄와 벌>을 애독하는 구지라에 대한 묘사는 기괴하기까지 하다. 곳곳에서 도스토옙스키의 명문장을 구사하는 구지라는 33번째 희생자를 은퇴시킨다. 이 두 명의 주인공을 묶어 주는 사건은 바로, 스즈키의 원수 데라하라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또 다른 밀치기 킬러의 개입으로 데라하라는 비명에 간다.

세 번째 주인공 세미(일본어로 매미를 의미한다)는 능숙한 칼잡이로 일가족 몰살이 장끼란다. 의뢰받은 사건을 처리한 세미는, 사건 현장에서 우연히 영화 한 편을 보고 자신의 상황을 반추해 보게 된다. 일은 항상 자기가 처리하는데, 자신의 상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이와니시의 인형처럼 조종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기만 하다. 깨달음은 언제나 그렇듯이 삶의 본질에 대한 회의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던가, 세미는 혼란하기만 하다. 좀 생뚱맞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난 왜 세미가 여자라고 생각을 했을까.

이사카 고타로는 사건과 주인공들 그리고 적당한 암시가 준비되자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아들 데라하라의 어이없는 죽음에 격분한 데라하라 사장은 모든 조직원을 풀어 예의 밀치기 킬러를 뒤쫓는다. 하지만, 현장에서 예의 킬러를 목격한 스즈키가 가장 유리한 고지에 서 있다. 그는 밀치기 킬러가 아주 지극히 평범한 가장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덩치가 산만한 자살 유도 전문 킬러 구지라는 그동안 자신이 은퇴시킨 이들의 망령들에 시달린다. 서로 얽히고설킨 인연들이 그들을 한판 운명의 대결로 인도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관심을 끈 캐릭터는 바로 구지라였다. 구지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천연덕스럽게 자살을 유도하면서(거의 살인에 버금가는 협박이 뒤따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구원과 살인이라는 도덕적 딜레마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신봉한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살 유도 킬러의 일을 수행하지만 오래전 그의 유일한 실패는 심리적 트라우마가 되어 그를 괴롭힌다. 구지라는 세미 같은 냉혈한 킬러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던 걸까? 미지의 세 번째 킬러로 등장하게 되는 밀치기 전문 아사가오 역시 자욱한 안갯속에 자신의 정체를 은밀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긴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그와 그의 가족에 얽힌 이야기에는 이사카 고타로 작가가 독자들을 위해 준비한 비장의 반전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과연 어느 캐릭터에게 자신을 투영시킬 수 있을까. 물론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킬러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유일한 인물은 바로 스즈키다. 아내의 복수를 꿈꾸면서도, 항상 그놈의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일을 그르치기 일쑤다. 자기는 전력을 다해, 추격을 하고 거짓말을 해보지만, 항상 그는 상대방보다 하수다. 이사카 고타로가 책의 어디선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캐릭터가 항상 대박을 터뜨리기 마련이 아니었던가.

책의 뒤표지에 나와 있는 대로 “이사카 고타로 최고의 엔터테이먼트 소설”이라는 광고가 하나 틀리지 않았다. 사실 작년에 읽었던 <골든 슬럼버>는 조금 호흡이 길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이번에 <그래스호퍼>는 전혀 달랐다. 굵직한 사건들을 통해 캐릭터 소개가 끝나자마자 작가는 바로 이어지는 추격과 살인 그리고 대결이라는 구도로 독자들을 마력적으로 사로잡아 버린다. 한동안 남미 소설의 특징을 이뤘던 ‘마술적 리얼리즘’도 환영과 망상을 적절히 배합해서 채용하면서 소설의 오락적 재미를 배가시킨다. 정말 이런 소설이라면 당장에 읽을 수밖에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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