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 빈센트 람 소설
빈센트 람 지음, 이은선 옮김 / 비채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책을 읽기 전에, 의사출신의 작가가 쓴 글이라고 해서 왠지 지루하겠구나하는 선입견을 가졌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그런 지루함 대신 마치 짧은 메디컬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엄청난 흡입력을 가진 소설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매 장마다 특별한 주제를 가진 이야기들에 서로 유기적인 연관성들이 적절하게 개입되면서 전개되는 양상이 도저히 신예작가의 작품이라는 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의례 의학소설이라고 하면 떠오르게 되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전문 의학용어들을 의식해서인지 작가 빈센트 람은 주인공들의 관계에 먼저 초점을 맞춘다. 의과대학에 진학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는 밍과 피츠제럴드라는 캐릭터들로 독자들을 유혹한다. 의대진학이라는 지상과제에, 남녀간의 밀고 당기는 달콤하면서도 때로는 치명적인 로맨스로 <기적>을 시작한다.

사랑의 장애가 되는 인종간의 격차,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였더라도 어느 순간 타인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관계의 휘발성 등이 빈센트 람의 글을 통해 하나하나 재현이 된다. 성공의 뒤안길에는 그렇게 경험해 보지 않은 이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짙은 외로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상처 입은 사람만이 타인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다는 카피가 와닿는 순간이었다.

주인공들의 고군분투를 보면서, 과연 그들이(미래의 의사 지망생들) 아픈 이들을 돕는 휴머니스트로 적어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고결한 도덕주의로 무장한 이들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렵다는 의대 시험을 위한 시간을 30분단위로 쪼개 공부를 해대고, 족보를 외우고, 이어질 면접에 대비하는 그네들의 모습을 보니 취업대란 속에서 번듯한 직장을 구하기 위해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청춘들의 그것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사실 <기적>은 보통 의학소설들이 독자들에게 제공해주는 싸구려 감동보다는 좀 더 의사들의 내면 묘사에 중점을 둔 것 같다. 그들 역시 보통 사람들처럼 사랑에 상처받고, 외로움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버겁게 살아가는 인생들이라고 빈센트 람은 선언을 하고 있다. 같은 인간 대 인간으로 이해해 달라는 말일까?

메디컬 드라마가 그렇듯이 의학소설 역시 그 꽃은 응급실에서의 상황일 것이다. 담당의들의 처방이 생과 사의 경계를 구분하는 그 순간의 미학이야말로 소설 <기적>에서 작가의 진가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과대망상증에 시달리는 환자의 정신상담을 맡기도, 혹은 경찰관에 의해 끌려온 환자에게 깨물리기도 하는 위험에 노출되기도 한다. 아무리 의사가 직업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역시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에게 충실한 장면은 감동 그 자체였다. 개인적으로 최고의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SARS에 감염되어 격리병동에 갇힌 천이 동료의사 피츠제럴드를 구하기 위해 보호막을 부수고 응급처치를 하는 장면이었다.

각 에피소드들에 시간과 공간적 갭을 배치한 작가의 탁월한 선견지명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의대입학을 위해 치열하게 살던 주인공들이 어느새 의대생이 되어, 해부를 하고 팀워크를 배우는 장면으로 또는 필드에 나가 각자 고유의 영역에서 치열한 삶을 사는 장면들로의 점프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런 빈 공간들을 독자들의 상상력으로 채워 넣으라는 작가의 조금은 까탈스러운 주문조차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책을 보면서, 이 책이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참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역자 후기에 보니 캐나다에서 이미 드라마화되었다고 했던가. 과연 드라마 버전은 어떨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고리타분해 보이는 의학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빈센트 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곧 이어 출간될 전망이라는 그의 다른 작품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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