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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 2 - 중일 전쟁부터 태평양 전쟁 전반까지
미즈키 시게루 지음, 김진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1월
평점 :
정말 오래 전, 야마오카 소하치라는 일본 작가의 <태평양전쟁>이라는 책을 읽었다. 아마 지금도 집 어딘가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일본 국민작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저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통해 그가 얼마나 극우성향의 작가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침략군으로 동원된 일본군을 황군으로 부르며 찬양하는 모습에 기가 질려 버렸다.
적어도 미즈키 시게루는 그런 모습은 보여 주지 않아 다행이다. <일본 현대사> 두 번째 권에서는 대미 개전 과정과 개전 초기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전황에 대한 소개가 중심을 이룬다.
서방에서는 나치스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두 번째 세계대전의 막이 오른다. 그전에 일독이 삼국동맹으로 파시즘 국가들이 세계를 집어 삼키겠다는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계 정세가 그렇게 급박하게 흘러가는 가운데, 주인공 미즈키 시게루의 일상은 안일하기 짝이 없다. 어떻게 보면 사회 부적응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는 일이 없으며, 학업이나 일 모두 적응하지 못한다. 신문배달 일을 하지만 그것도 실패다. 왠지 나중에 군에 끌려가게 되었을 때,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걱정이 될 정도다.
거대한 중국을 집어 삼키겠다고 나선 중일전쟁도 무모했지만, 태평양의 패권을 두고 미국과 맞장을 뜨겠다고 나선 주전론자들의 현실인식은 큰 문제였다. 그리고 결국 나라를 패망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1940년 6월 히틀러의 기갑부대가 프랑스를 석권하고 파리마저 점령하면서 동아시아에는 힘의 공백이 발생했다. 일본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프랑스령 북부 인도차이나에 진주하는데 성공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의 동아시아 확장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미국은 미국내 일본 자산 동결조치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일석유 금수조치를 취하면서 일본 군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중립정책을 유지하고 있던 미국의 잠재적 공업생산력을 일본은 과소평가했던 게 아닐까. 말만 중립이었지 미국은 스스로 민주주의의 병기창을 자처하며, 유럽 대륙에서 히틀러를 가까스로 상대하고 있던 영국에 무기 원조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복잡한 대일교섭이 이루어지고 있던 개전 전야,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반년이나 1년 정도는 미국과 용감하게 싸울 수 있지만 그 다음은 장담할 수가 없다고 했던 예언이 그대로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
당시 일본 내각에서는 원만한 대일교섭으로 개전을 원하지 않았지만,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의 대미 강경노선으로 결국 그를 외무대신에서 사퇴시키기 위해 내각총사퇴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였다. 전쟁보다 평화를 우선해야 하는 외무대신이 오히려 전쟁 충돌을 조장하는 장면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1941년 11월 26일 미국 국무부장관 헐은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중국과 인도차이나 등지에서 조건 없이 철군하고 삼국동맹을 사문화하라는 이른바 헐 노트를 보내고 이에 격분한 일본 군부는 개전을 결정한다.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나구모 주이치가 이끄는 연합함대는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분쇄하기 위해 진주만 기습에 나서고, 그렇게 전쟁이 시작됐다.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된 전쟁을 환영한 이가 있었으니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였다. 선제공격을 당한 마당에 미국내 전쟁반대론은 설 자리가 없었다.
개전 초기 진주만 기습 성공으로 기세가 오른 일본군은 말레이 반도(싱가포르)를 필두로 해서, 바타비아와 필리핀, 홍콩 등을 석권한다. 물론 일본군의 대비와 전략 전술도 개전 초기 승승장구의 원인이기도 했지만 유럽에서 히틀러와 싸우는데 전력을 다하는 바람에 동아시아 식민지 군대는 2선급이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필리핀 전선에서 미군을 격퇴한 혼마 마사하루 중장이 종전 후 바탄 죽음의 행진 사건 때문에 전범으로 교수형 당한 것에 대해 저자는 사령관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하지만, 포로 수용 문제에 있어 일선 부하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을 현지 사령관이지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일본의 남방 진출이 영국과 네덜란드의 오랜 식민 지배에 대항하기 위한 <대동아 성전>이라는 선전은 처음부터 거짓이었다. 일부 독립 세력들을 일본이 지원하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설계된 철저한 프로파간다였을 뿐이다. 서구 세력을 무력으로 몰아낸 일본이 새로운 지배자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일본이 남방에서 새로 확보한 영토들은 오로지 자원 수탈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피지배 계급의 반발은 명약관화했다.
남양군도 각지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주인공 미즈키 시게루 역시 이미 해군 장교로 선발된 형 소헤이에 이어 소집영장이 떨어졌다. 소헤이는 뉴기니 전선에서 고사포 부대원이었는데, 포로로 잡힌 미군 병사 처우 문제로 훗날 전범으로 처벌받았다고 한다. 군에 들어가면서부터 후임병 시게루의 고난이 시작됐다. 구 일본 제국 군대의 문제점 중의 하나인 일상적 구타가 시게루에게 이루어졌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시게루의 대답이 “예에~”처럼 늘어진다고 마구 두들겨 패대는 게 일과였다.
미즈키 시게루 작가는 팔라우부터 시작해서 웨이크섬, 알류션 제도 등 잘 알려지지 않은 태평양 전쟁의 거의 모든 전역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잘 나가던 일본이 해전에서는 미드웨이 그리고 육전에서는 과소평가했던 미군에게 과달카날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당하면서 역사의 변곡점에 도달했다. 많은 인구가 살고 있던 중국 대륙의 전투에서는 현지조달(이라고 쓰고 약탈이라고 부른다)이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솔로몬 제도 같이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에서 전투는 중국 전선과 같은 현지조달이 전혀 불가능했다. 도쿄의 대본영에서는 이런 현지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과달카날 비행장 점령에 투입된 미군의 실력에 대해서도 개전 초기 무기력하게 무너진 식민지 부대 전투력 정도로 과소평가한 게 문제였다. 이런 악조건을 이기고 일본군이 과달카날에서 승리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게 아니었을까.
원래부터 솔로몬 제도 공략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던 해군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장관의 주장대로 2개 사단을 투입해서 비행장 점령에 나섰다면 전황은 또 달라졌을지 모른다. 이치키 지대, 가와구치 병단에 이어 2사단과 38사단을 축차적으로 투입하는 소모전으로는 도저히 압도적인 물량공세를 펼치는 미군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보급 역시 심각한 수준으로 빈약한 보급과 말라리아 때문에 일본군은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를 수가 없었다.
시게루는 드디어 팔라우를 거쳐 뉴브리튼의 라바울로 전속된다. 일본 군부는 미드웨이 패전을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허위 승전 사실로 호도한다. 심지어 과달카날의 패전도 후방으로의 전진이라는 말로 시민들을 속였다. 이런 상태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걸까. 공업 생산력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미국은 모든 분야에서 일본의 생산력을 압도했다. 미해군의 활약으로 남방에서 자원 입수가 어려워진 일본이 남양군도에서 입은 손실들을 점점 만회할 수 없게 된 반면, 미국은 전함과 항공모함 그리고 전쟁 물자들을 생산해냈다. 태평양전쟁은 이미 이길 수 없는 전쟁 국면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뉴브리튼에서 저자의 종군 일기는 예전에 다른 작품에서 만난 적이 있어서 낯설지가 않았다. 뉴기니를 거쳐 필리핀 해방을 목표로 삼은 맥아더는 원래 라바울 공략을 원했지만, 요새화된 라바울 공략이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치열한 전장에서 빗겨 나가게 됐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저자가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뉴기니 전선이나 필리핀 전선에 투입되었다면 아마 현지에서 옥쇄라는 이름으로 전사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전선에서 패배를 거듭하면서, 일본군은 발악적인 옥쇄전으로 미군을 상대했다. 항공모함 전력과 유능한 전투기 조종사들이 잇달아 전사하면서 사실상 연합함대 소속 기동부대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일본의 전쟁지도부가 조기에 패전을 모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면, 무의미한 희생을 막을 수 있었겠지만 폭주를 거듭하던 전쟁기계를 막을 수 있는 기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 중의 하나는 학업이나 일에서 근성을 보여주지 못한 미즈키 시게루 작가가 전후에 이런 방대한 작품을 완성했다는 점이 참 인상적이었다. 선대에서 유래한 “바보 같은 짓”이 집안의 전통이라던 작가가 남긴 대단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