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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세상 - ‘세상 끝’으로 내몰리는 고래와 그 고래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ㅣ ink books 8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써네스트 / 2023년 4월
평점 :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반세기도 전에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자기 인생의 텍스트로 삼은 십대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삼촌의 도움으로 지구의 끝으로 가서 포경선에 올랐다. 짧지만 강렬했던 추억을 소년은 중년의 작가가 되어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그는 2020년 4월 16일 하늘의 별이 되었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이야기다.
출근 길 버스에서 <세상 끝의 세상>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소년 세풀베다처럼 지구의 끝, 파타고니아에 가볼 수 있을까라고. 이제 그러기엔 나이도 많이 들고 꿈도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지만 그냥 그래도 언젠가 한 번 가보고 싶다고.
문학적 경험이 실질적 체험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살면서 얼마나 될까. 소년 세풀베다는 <모비 딕>을 읽은 다음, 벅찬 가슴을 안고 친구들처럼 여름방학을 대충 보내지 않고 스스로 고생길을 자처한다. 지구 끝으로 달려가는 마음이 그랬을까. 화물선 ‘에스트레야 델 수르’ 호에서 주방 보조로 일하면서 선장에게 성실함을 인정받기도 한다. 감자 깎는데 이골이 난 소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구시대의 낡은 포경선에 올라 고래잡이를 체험한다. 아, 멋지다. 어린 시절에 그런 체험을 했다면 나도 그처럼 글쓰기로 승화시킬 수 있었을까.
30년이란 시간이 흘러 독일 함부르크에 사는 망명자 세풀베다는 불법 고래 포획에 나선 일본 국적의 니신마루 호 사건 취재에 나서게 된다. 왜 우리는 고래를 잡아선 안 되는가. 그것이 일단 불법이라는 걸 떠나, 고작 식도락이나 미용을 위해 자유롭게 바다에서 살고 번식하는 고래를 잡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오로지 돈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시장의 요구에 따라 오늘도 포경선들이 고래를 잡으러 나선다.
또 한편에는 첨단 시설을 갖추고 현장에서 잡은 고래를 가공까지 할 수 있는 니신마루 호에 저항을 불사하는 피니스테레(라틴어로 땅 끝이라는 의미의 합성어라고 한다) 호의 선장 호르헤 닐센 같은 이도 있다. 산 채로 잡혀 가죽이 찢기고 살이 갈리는 비극의 현장을 목도한 닐센 선장과 동료들은 범선에 폭탄을 붙들어 매고 현대문명의 잔혹한 이기인 니신마루 호와 동귀어진하려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프랑스 정보당국이 설계한 국가 테러로 무지개 선단의 운동가는 죽기도 했다지.
이 모든 사실을 글로 체화시킨 세풀베다의 진술은 독자의 가슴을 때린다. 토착 군부 세력에 의해 추방당한 저자는 수십 년 만에 환경을 보존하고 남태평양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사는 인간보다 더 나은 감수성을 지닌 (돌)고래들을 지키기 위한 연대를 위해 조국을 찾는다. 그리고 유랑 지식인은 끝없이 자신에게 묻는다. 대의를 위해 싸우는 자신들의 행동이 어쩌면 이기적인 것이 아니었느냐고 말이다. 군사독재에서 벗어난 조국에 이미 준비된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우는 대신 의도적인 유랑을 계속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과 사유가 이렇게 와 닿을 수가 없더라.
자신들의 동료들에게 총탄을 쏟아 부은 니신마루 호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드는 범고래들에 대해 닐센 선장이 들려주는 말은 그야말로 전설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싸운 닐센 선장과 그의 동료 페드로 치코를 보호해주는 장면에서는 짠한 연대가 떠올랐다.
어쩌면 지난 며칠 동안 내가 읽은 세풀베다의 책들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사전 준비운동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칠레 앞바다에서 군인들의 묵인 아래 벌어지는 무분별한 고래 사냥, 어쩌면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책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남벌되는 아메리카의 아름다운 나무들... 아무리 개인적으로 윤리적 소비를 강조해도,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경제 활성화를 위한 환경파괴에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지 묻게 된다. 세풀베다 작가가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면, 나는 어떤 존재일까.
그러니까 다 필요 없고, 초록빛 지구별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진심으로 ‘세상의 끝’에 가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