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튜브와 인별그램 때문에 점점 장편 소설이나 긴 영화 시청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참 영화를 많이 봤었는데 이제는 그 시절보다 더 환경이 좋아지고 거의 보고 싶은 영화들은 다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극장에도 잘 가지 않게 되었고 영화 보는 것도 시큰둥해져 버렸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그래도 가끔 어떤 영화가 갠춘다더라 하는 건 또 그런 SNS으로 알게 된다. 어젯밤에 본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도 그렇게 만나게 된 작품이다. 1883년 이탈리아 작가 카를로 콜로디가 창조한 나무인형 피노키오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정확하게 원전이 어떻게 되더라.

 

개인적으로 원전보다 점점 더 변용이 마음에 들게 되더라. 사고는 진보주의자를 자처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또 보수주의가 웅크리고 있달까. 원전 피노키오도 좋고, 이번에 새로 나온 원전보다 훨씬 더 다크한 피노키오 그리고 반전 메시지를 담은 변용도 마음에 들었다.

 

다크 판타지 애니메이션 피노키오의 시작은 하나의 솔방울로 시작한다. 마스터 제페토 아저씨는 전쟁 중 폭격으로 사랑하는 외아들 카를로를 잃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완벽한 목수로 불리던 이의 추락이 아들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다. 아들이 애지중지하던 솔방울을 아들의 묘 근처에 묻었고, 솔방울에서 싹이 나서 소나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광기에 휩싸인 제페토 아재는 그 소나무를 베어 나무인형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게 바로 피노키오의 탄생이다. ,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생중계하듯 전달하는 이가 있었으니, 이름하야 세바스티안 J. 크리켓이다. 목소리는 이완 맥그리거가 맡았다.

 

클리셰이지만 천둥번개가 쾅쾅 치는 가운데, 새로운 생명 창조에 나서는 마스터 제페토의 모습은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연상시켰다. 목수의 아들로 생명을 잃은 카를로의 이미지는 지저스 크라이스트가 떠오르기도 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정말 다양한 이미지와 서사의 변용을 이번 피노키오 애니메이션에 담아냈다.

 

숲의 정령들이 모여 나무인형 피노키오의 몸에 들어갔고, 마지막으로 나무의 요정이 등장해서 내일 아침 피노키오에게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명한다.

 

날이 밝고, 생명을 얻은 피노키오의 천방지축이 시작된다. 새로운 피조물 피노키오는 인간사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 그나마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게 다행이지 싶다. 병을 깨고, 마스터 제페토의 작업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면서 즐거워하는 피노키오. 아들을 상실한 비통한 마음에 나무인형 피노키오를 만들었지만, 피노키오가 카를로를 대신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마스터 제페토. 그러니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피노키오의 비극적 운명은 결정된 게 아니었을까. 마스터 제페토를 줄곧 파파라고 부르는 피노키노와의 평행선이 손에 잡힐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성당에 간 마스터 제페토를 쫓아간 피노키오는 그곳에서 화려한 데뷔전을 치른다. 나무십자가에 매달린 지저스 크라이스트의 형상을 따라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골수 파시스트 시장님은 버르장머리가 없는 피노키오가 학교에 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래도 나무인형이라고 차별하지 않아서 다행인가.

 


순종적인 카를로를 닮기 위해 카를로가 사용하던 교과서를 들고 학교에 가겠다던 피노키오는 볼페 백작이 운영하는 유랑극단에 스카웃되어, 노예계약을 맺고 합류한다. 아이들은 원초적으로 즐거움을 원하는 쾌락주의자다. 그런 아이들에게 학교 교실에 앉아서 읽기와 쓰기 그리고 곱셈표를 배우라는 건 어불성설이 아닌가 말이다. 어린 나이에서부터 그런 주입적인 교육 시스템에 가두어지는 아이들의 미래가 참 그렇게 느껴졌다. 결국 획일화된 교육시스템을 통해 길러진 미래의 산업전사 양성이 목적이 아닌가 말이다. 거기에 경쟁까지 첨가되면 무엇이 즐거울까.

 


볼페 백작은 살아 있는 꼭두각시 피노키오의 가치를 알아보고 동업자 바분 스파자투라의 도움을 얻어 피노키오를 이용해서 돈벌이에 나선다. 일단 노예계약으로 피노키오의 인신을 구속하고, 전형적인 아동 노동(child labor)를 실행에 옮긴다. 그렇다고 피노키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는다. 나중에 자신이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마스터 제페토의 짐을 덜기 위해 다시 유랑극단에 합류할 때 피노키오는 당당하게 자신의 몫을 제페토 아재에게 보내 달라고 요구했지만, 악덕 자본가 볼페 백작이 그럴 리가 있을까.

 

개인적으로 원작과 가장 큰 차이점은 감독이 강력하게 집어넣은 반전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우선 마스터 제페토의 카를로가 폭격으로 성당에서 사망했다. 얼치기 두체가 이끄는 국가 이탈리아는 어린 소년들마저 병사로 만들기 위해 유소년 밀리터리 캠프를 운영한다. 포데스타(시장님?)는 자신의 아들 캔들윅을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용감한 파시스트 전사가 되라고 강요한다.

 

밀리터리 캠프에서 적군과 아군으로 나뉘어 경쟁을 벌이던 피노키오와 캔들윅은 사이좋게 무승부로 승부를 내지만, 포데스타는 그걸 용납하지 않는다. 진짜 권총을 아들 캔들윅에게 건네 주며 권총으로 피노키오를 쏘라고 명령한다. 세상에 이게 아이들이 보는 동화가 맞나 싶을 정도의 설정이었다.

 

참 그전에 유랑극단을 따라 나선 마스터 제페토는 마지막 공연을 위해 카타니아로 떠난 피노키오를 따라잡기 위해 바다에 나섰다가 괴물 물고기에게 삼켜진다. 어째 이 부분에서는 또 성경에 등장하는 요나의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가. 결국 모든 서사는 상호연관을 통해 그때에 맞는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 운명이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으로는 죽지 않는 피노키오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애니메이션을 통해 피노키오는 두세번 정도의 죽음을 맞는다. 어느 순간 소멸한 숙명의 인간과 달리 피노키오는 명계에서 보내는 시간의 차이 뿐 다시 부활에 성공한다. 죽음마저도 유쾌하게 다루는 게 바로 연출하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실력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이야기의 빌런들인 볼페 백작과 포데스타는 동화적 서사의 순리(?)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볼페 백작은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한 어린이 노동자 피노키오가 스파자투라의 조력으로 자각해서 자신으로부터 떠나려고 하자 자신이 소유할 수 없다면 차라리 불태워 버리자는 막가파식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정말 악랄하지 않은가. 파시스트 국가와 얼치기 지도자 일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아들까지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신념으로 무장한 포데스타 역시 죽지 않는 불사신의 병사 피노키오를 전쟁에 이용해 먹을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이런 빌런들의 최후와 처리는 예정된 수순으로 진행된다.

 

역시 피노키오 서사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괴수 물고기 뱃속에 집결한 마스터 제페토와 피노키오, 미스터 크리켓 그리고 스파자투라의 탈출이다. 평화로워 보이는 바다에 둥둥 떠 있는 무시무시한 기뢰들은 전쟁이 주는 불안과 두려움의 상징이다. 바로 그 기뢰를 이용해서 괴물 물고기의 공격으로부터 탈출하는데 성공한 피노키오는 세 번째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명계로부터 돌아오는 마지막 결정을 하는 장면에서는 영화 <A.I.>의 데이빗 생각이 바로 났다. 자신이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마스터 제페토를 구하기 위해 피노키오는 어쩌면 보장된 영생을 포기하고 지상으로 복귀한다.

 

뻔히 아는 서사였지만, 결국 엔딩에 가서는 감동의 도가니탕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메시지라고 할 수 있는 반전부터 시작해서, 인간 소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주로 지루할 틈이 없었다. 게다가 익숙한 피노키오의 전통 서사를 뼈대로 삼아 거부감을 줄이는 기술도 놀라웠다. 무엇보다 나와 다른 이를 내 방식으로 변화시키려고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라는 메시지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여전히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고 있는 나부터 바뀌어야 하겠지만.


[뱀다리] 본문에 빼먹었는데 스티븐 킹의 <펫 세머터리>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 이야기의 변용도 엿볼 수가 있었다. 제페토 아재가 올라탄 배의 선장의 모습에서는 <모비딕>과 후크 선상이 연상되기도 했다. 왜 이렇게 연상되는 것들이 많은지.

마스터 제페토는 초반에 완벽주의자로 등장하는데, 불완전한 피조물인 인간의 완벽함에 대한 냉소적 시선으로 읽히기도 했다.

볼페 백작에게 가스라이팅당하는 연예계의 떠오르는 스타가 된 피노키오의 모습에서는 최근 소속사와 정산 문제로 심각한 분쟁이 발생한 어느 가수가 떠오르기도 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그 이야기를 보고 만들었나 싶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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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2-16 1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반전 메시지로의 변용이라니 궁금합니다. 원전을 각색하는 경우 그 원전을 그대로 복사하듯 묘사하느냐 아니면 비틀어트느냐 하는 게 있는데 피노키오처럼 아주 오래된 동화나 고전의 경우는 이렇게 감독이 원하는 방식을 주입시키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에요.
저도 영화관 가본지가 참 오래 되었습니다. 조만간 영웅 보러 가게 될 것 같긴 한데~ 이 영화 재미날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2-12-16 13:34   좋아요 1 | URL
저도 화가님처럼 후자에
더 무게중심을 두고 싶습니다.

전 <아바타>가 보고 싶긴
한데 좁은 영화과에서 3시간
12분을 버틸 재간이 없어서
걱정이네요.

거리의화가 2022-12-16 13:45   좋아요 1 | URL
옆지기는 제가 아바타 보러 가기 싫다고 했더니 오늘 혼자 보러 간다고!ㅎㅎㅎ 러닝타임이 너무 길어요ㅠㅠ

stella.K 2022-12-16 1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제페토가 여기서 나왔군요. 피노키오는 알아도 제페토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아요.
아바타는 그런 단점이 있긴 하지만 본전은 뽑겠네요.
하긴 어제 지하철 고장나서 일곱시간인가 갇혀 있었다는데 화장실도 못 기는 폐쇄적 상황 생각만 해도 끔찍하죠. 울나라 드라마 60분 16부작 이젠 가히 살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대도 대하드라마 32부작이 만들어진다는군요.

레삭매냐 2022-12-19 09:14   좋아요 1 | URL
그렇죠 아무래도 피노키오
가 주인공이다 보니 :>

새로 나온 피노키오에서는
마스터 제페토의 이야기
비중이 상당하더군요.

예전에 왕건이 200부작
아니었나요? 참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