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별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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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11볼라뇨를 읽는 중이다. 역시 예전에 한 번 읽었던 글들이라 그런지 소화가 쑥쑥되는 그런 느낌이랄까. 볼라뇨 읽기 가운데 <먼 별>과 만났다. 그리고 내가 가장 처음으로 만난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맨 끝에 실린 단편을 확장해서 리라이팅한 것이 바로 <먼 별>이었다.

 

<먼 별>은 독재문학을 기초로 삼은 느와르 스타일의 추리소설이다. 볼라뇨의 얼터 이고라고 할 수 있는 아르투로 벨라노가 들려주는 연쇄 살인마 카를로스 라미레스 호프만 혹은 카를로스 비더, 그도 아니라면 알베르토 루이스 타글레의 삶을 추적한다. 전작에서 짧게 다뤄진 서사는 <먼 별>에서 보다 확장된 서사로 독자를 맞이한다. 나는 그래서 결국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을 찾아 호프만 중위의 전사(前事)를 찾아 읽어 봤다. 인물들의 이름이 조금 다르게 나오지만 크게 상관은 없다.

 

1970년대 초반, 시창작 교실에 나타난 알베르토 루이스 타글레와의 인연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는 사실 카를로스 라미레스 호프만이라는 이름의 칠레 공군 소속의 중위였다. 그러니까 그는 소위 시창작 교실이라는 간판을 걸고 불온한 모임을 갖는 좌파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임무를 맡은 프락치(fraktsiya)였다. 시창작 모임에는 당시 문단에서 주목을 받던 베로니카와 앙헬리카 가르멘디아 자매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다 아는 1973911, 쿠데타가 발생했고 가르멘디아 자매는 지방으로 몸을 피했다. 루이스 타글레는 어느 날 밤, 그는 문단에서 주목을 받던 가르멘디아 자매를 찾아가 살해한다. 어때, 시작부터 살벌하지 않은가.

 

시리얼 킬러 공군 중위의 기행은 이제 막 시작됐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 주력기였던 메서슈미트 Bf 109를 몰고 공중에 연기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Fiat Lux라는 요한복음 첫 장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문구를 스페인어도 아닌 무려 라틴어로 쓰는 이 빌런은 분명 지식인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가 지식인이라고 해서 그가 암흑 시절에 행한 악행이 지워지는 건 아닐 것이다.

 

볼라뇨의 다른 작품 <칠레의 밤>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니카시오 이바카체 신부/평론가가 등장해서 카를로스 비더의 작품에 대한 평을 하는 시퀀스도 아주 흥미로웠다.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들을 작품에 등장시켜 상호간에 작용시키는 기법이 마음에 들었다. 부정적으로 표현하자면, 캐릭터의 재활용인데

 

국가적 재난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산티아고 퍼포먼스를 대충 마친 이 빌런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소름 끼치는 사진 전시회를 기획해서 손님들을 초대한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한 소시오패스 같은 고백이라고 할까. 그는 분명 시인을 위장한 예술가가 아닌 범죄자였다.

 

우리의 아르투리토 벨라노는 그전에 볼셰비키 유대인이었던 후안 스테인과 디에고 소토라는 특별한 인물들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아르투리토 벨라노가 나치와 2차 세계대전 마니아라는 건, 그의 저작들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먼저 피노체트 쿠데타가 발생한 칠레를 탈출해서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독재에 대한 무장투쟁이 벌어지는 거의 모든 곳에 등장해서 전설이 된 시인이자 전사였던 후안 스테인은 이반 체르냐호프스키라는 독일 파시스트를 상대로 한 소련의 대조국전쟁에서 명성을 날린 공산당 장군의 조카였다. 문학과 무장투쟁이라는 상극의 요소 역시 별반 차이가 없다는 말을 작가는 하고 싶었던 걸까. 시 창작 교실의 지도자였던 양반이 느닷 없이 게릴라 전사로 변신해서 마나구아 해방과 엘살바도르 내전에 참가해서 명성을 날렸다는 그야말로 판타지에 가까운 서사가 얼마나 매력적이던지. 그리고 어려서 사고로 두 팔을 잃은 로렌소 아니 로렌사에 대한 에피소드도 기억할 만하다.

 

후안 스테인의 삶을 추적하는 장면과 슈퍼 빌런 카를로스 비더의 뒤를 쫓는 장면이 중첩되면서 몽매한 독자는 다시 한 번 문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책을 읽고 나서 부조리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동력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아니 그렇게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점진적인 의식의 전환을 이루는 것만으로도 귀중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 책을 읽는다는 행위에 대한 보상이 되지 않을까라고 감히 유추해본다.

 

, 이제 본격적인 시리얼 킬러의 추적에 나설 차례가 되었다. 우선 아옌데 정부 시절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던 전직 경찰 아벨 로메로가 등장한다. 아옌데 대통령에게 훈장을 받은 로메로는 피노체트 시절 반체제 인사로 분류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고 유럽으로 망명했다. 나고 자란 땅이 아닌 타지에 뿌리를 내린 이들처럼 수년간의 고생은 나라 잃은 망명자들에게는 기본 옵션이었다. 그리고 다시 모든 것을 망각시키고, 파괴해 버리는 시간이 흘러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던 로메로에게 동포 한 명이 카를로스 비더를 찾아 달라는 의뢰를 한다. 돈 걱정은 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카를로스 비더 혹은 루이스 타글레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악행 때문에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종적을 감췄다. 자신을 드러낸 악당보다 이렇게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사라진 전설적 살인마를 추적하는 게 소설적 재미를 더 주지 않는가 말이다. 아벨 로메로는 우리의 아르투리토를 찾아와 시인 행세를 하는 범죄자를 찾아 달라는 주문을 한다. 자신만의 문학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이비 시인이 이곳저곳에 남긴 자료들을 안겨 주면서. 50만 페세타의 사례비는 아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르투리토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로메로가 카를로스 비더를 찾아내면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피는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암흑시절에 사라져간 이들에게 그리고 피의 복수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그저 공허한 외침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12년 전에 볼라뇨의 책들이 나오는 족족 사서 읽던 시절이 문득 생각났다. 볼라뇨를 다시 만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갑자기 애정하게 된 작가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자 허겁지겁 제대로 씹지도 않고 그대로 삼켜 버렸다면, 지금은 좀 더 익은 시선으로 그의 저작들을 만나고 있다.

 

시작부터 끝까지 로베르토 볼라뇨가 <먼 별>에서 설계한 서사는 완벽하지 않았나 싶다. 독재문학이라는 베이스에 카를로스 비더-알베르토 루이스 타글레라는 시대의 악당을 배치하고, 한 시대를 명멸해 간 인물들을 관조적인 시선에서 조용하게 수놓는다. 가해자들은 용서와 화해를 말하지만, 피해자들은 복수를 원한다. 이렇게 서로 상충하는 생각들을 두고, 열린 결말이라는 탁월한 선택으로 <먼 별>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스스로를 유럽의 공장들에서 길을 잃은 묘한 시인”으로 자신을 규정한 로베르토 볼라뇨.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뱀다리] 볼라뇨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서사들이 모두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이야기들인지 궁금해졌다. 실제 피노체트 군사독재 시절에 있었던 사건 사고들에 대한 볼라뇨식 변형이 아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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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5-13 15: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글을 읽을 때 매번 느끼는 감탄은 인용문을 쓰지 않아도 글을 채우실 수 있는 능력이십니다.
언젠가는 저도 그런 경지에 오르기를 바래봅니다~~
그리고 로베르토 볼라뇨 작가 다시 찜합니다^^

레삭매냐 2022-05-13 20:28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제가 책 읽으면서 인용하겠
노라고 밑줄도 좍좍 긋고
메모도 하지만 막상 리뷰를
쓸 적에는 기냥 느낌으로
파파밧~하는 스탈이라 인용
을 못하곤 하네요 :>

사람들마다 다 스탈이 다르니
깐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
다.

mini74 2022-05-13 17: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볼리뇨 작가분이 매냐님 리뷰를 본다면 감동하지 않을까요 ㅎㅎ 볼라뇨 작가를 매냐님 통해서 전 알게됐어요. 이제 책만 읽으면 됩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2-05-13 20:29   좋아요 2 | URL
ㅋㅋㅋ 하늘에 계신 그 양
반이 미니님의 덧글을 봐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칠레 출신 돌 I, 문학의 이단
아 작가의 매운맛을 속히
보시길 기대해 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