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 : 그래픽노블
존 제닝스 그림, 옥타비아 버틀러 원작, 데이미언 더피 각색, 박설영 옮김 / 프시케의숲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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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그래픽노블이라는 치트키를 사용했다. 요즘 책읽기 재미도 그냥 그렇고 해서, 이럴 땐 모름지기 그래픽노블이지라는 생각으로 옥타비아 버틀러의 <> 그래픽노블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주문장을 날렸고, 책을 받았으며 그 자리에서 아마 바로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서 한참 있다가 희미해진 잔재 위에 리뷰라는 결과물을 쌓아본다.

 

주인공은 26세의 데이나 프랭클린은 왼쪽 팔을 잃은 채 병원에서 깨어난다. 때는 1976년 여름, 아마 미국 건국 200주년을 기념한다고 사방에서 불꽃놀이 준비가 한창이지 않았을까. 그녀는 이제 막 1815년 메릴랜드로부터 마지막 시간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소설의 원제인 킨드레드는 혈연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자신의 조상일지도 모를 1815년의 루퍼스 와일린 일병 구하기를 하러 숱하게 현재와 과거를 오가다 등짝에 심하게 채찍을 맡기도 하고 와일린 농장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결국 귀환길에 결국 팔까지 잃은 것이다. 아니 목숨을 잃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데이나는 자신과 띠동갑내기 백인 남편 케빈과 함께 산다. 아마 데이나가 그꼴로 현재로 왔다면 경찰들은 당연히 남편인 케빈을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도 아니었고, 자신의 타임슬립에 대해 설명한다 해도 경찰들은 아마 그녀를 미치광이 취급을 하지 않았을까. 흑인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시선이 그래픽노블의 초반에서부터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혐오와 차별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다.

 

데이나는 루피가 과거에서 죽음의 위협(?)에 빠질 때마다 등장해서 루피를 돕는다. 그런데 루피의 가족들은 그녀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을 1도 가지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와일린 패밀리로 하여금 흑인들에게 그런 혐오와 차별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었을까? 19세기 미국 사회는 순전히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 도모하기 위해 강제로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기 시작했다. 자신들과는 다른 피부색을 가진 같은 인간들을 우생학적으로 구분해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 규정했다. 그들의 희한한 논리에 성경에 나오는 노아와 아들들의 이야기가 동원된 건 또 하나의 역설이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진짜 메시지 대신, 취사선택한 한 부분이 전체를 집어삼키는 방식으로 독실한 기독교도들 역시 흑인 노예를 양심에 거리낌 없이 부렸다.

 

과거로의 타임슬립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데이나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시간여행에 대비해서 준비하기 시작한다. 197669일의 데이나는 자유인이지만, 1815년으로 간 데이나는 백인들의 눈에 그저 바지를 입고 잘난 척하는 이상한 모양새의 흑인일 뿐이었다. 데이나가 자신들처럼 유창하게 글을 읽고, 논리를 구사한다는 점도 톰 와일린을 비롯한 백인 농장주들은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루피의 아버지 톰은 채찍으로 데이나에게 혹독한 교훈을 안겨준다. 당장의 물리적 폭력은 자유로운 인간의 사유를 마비시키고, 현실에 적응하도록 강제하는 그런 효과를 가져온다.

 

당시 미국 남부에 수많은 흑인들이 노예로 있었는데 왜 그들이 로마 시대의 스파르타쿠스 반란 같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나 하는 점이 나는 항상 궁금했다. 그런데 데이나 같은 자유인도 압도적인 폭력과 시스템적으로 고착화된 노예제도 그리고 무엇보다 지속적으로 현실과 타협하고 내면화시키게 되는 과정이야말로 서구에서 가장 선진적이었다는 민주주의 국가 미국 사회에 잉태된 비극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그에 수반된 혐오와 차별은 주류 사회의 인식에서 제거되지 않았고, 현재진행형이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정치인들이 그것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한 불쏘시개로 사용하는 건 이제 일상이 된지 오래다.

 

루피는 데이나에게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도 그녀가 정작 바라는 도움은 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녀를 방해한다. 데이나 남편 케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데이나의 편지를 보내지 않고 숨겨둔 것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흑인 여성 앨리스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녀를 반복해서 성적으로 착취하고, 앨리스가 낳은 아이들도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냉혈한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대의 한계로 그냥 치부해 버리기엔, 루피는 정말 덜되 먹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결국 어떤 환경에서, 어떤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는가가 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나 싶기도 하다. 루피라는 캐릭터는 결국 타인 뿐 아니라 자신까지도 파멸시키는 그런 빌런의 역할을 소설에서 톡톡히 해낸다.

 

주인공 데이나는 결국 우여곡절 끝에 신체가 훼손된 상태로 현재로 돌아오는데 성공한다. 과거에서 자신을 쫓는 백인들에게 살해당하지 않고,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그런데 왜 옥타비아 버틀러 작가는 데이나를 과거로 보내 이런 참혹한 여정을 겪게 했을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16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혐오와 차별의 유산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데이나는 온갖 고생 끝에 팔을 잃고 현재로 돌아오지만, 케빈은 다친 데 하나 없이 멀쩡한 상태로 귀환한다. 이런 비극은 왜 여성에게만 벌어지는가. 사랑이라는 허망한 구실 아래, 루피에게 갖은 학대를 당하던 앨리스도 마찬가지다. 처연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데이나의 조상들이 노예로 일했다면, 데이나는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한다. 데이나의 남편 케빈은 글쟁이로 성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데이나와 결을 달리 하는 삶을 영위한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뿌리 깊은 인종주의의 유래 그리고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이들에 대한 몰이해의 근원이 결국 경제적 차이와 교육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렇게 예리하게 지적한다. 데이나는 와일린 농장에 사는 흑인 꼬마들에게 글을 가르치다가 농장주 톰에게 발각되어 정말 호되게 채찍질을 당하지 않았던가. 백인 주인들은 개화된 흑인들이 자신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위협이 될 거라는 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에 무자비한 폭력으로 예방을 하려고 한 게 아니었을까. 이런 폭력적 환경에서 자란 루피 역시 학대의 악순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옥타비아 버틀러 작가가 구사하는 <>의 진짜 비극은 자유인이었던 데이나가 과거의 와일린 농장에서 어쩔 수 없이 노예 같은 삶에 조금씩 내재화하는 장면들이었다. 처음부터 자유를 몰랐던 사람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캘리포니아의 자유로운 환경에서 살던 데이나가 메릴랜드의 농장에서 복장과 말투까지 사사건건 간섭당하는 장면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환자가 아프다고 하면 무조건 사혈로 치료하려고 덤비던 당대 돌팔이 의사 대신, 현대 의학에 대한 지식으로 사람들을 치유하는 데이나가 주술사처럼 떠받들어지는 장면도 흥미로웠다.

 

원작의 상당 부분을 압축한 <킨 그래픽 노블>을 보고 나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데이나의 타임슬립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인종주의 문제에 대한 저격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오랜 세월 굳어진 인종주의에 대한 편견에 입각한 확증편향을 고치는 게 얼마나 어려운 미션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그래픽 노블만으로는 여전히 성에 차지 않는다. 원작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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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4-21 17: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킨 이 그래픽노블로도 나왔군요. 매냐님 말씀처럼 데이나가 점차 어쩔수없어의 체념 단계 그리고 흑인의 과거여행이란 소재가 참 좋았던거 같아요 ~

레삭매냐 2022-04-21 17:56   좋아요 4 | URL
미국 건국 이래 자행된
남부 지역의 노예 제도에
대한 사회 경제적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아무래도
피상적인 책쟁이의 독해
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원작을 만나봐야지 싶네요.
참, 넷플릭스에서 이런 책을
가만 놔두는 게 이상하네요.

얄라알라 2022-04-24 2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가 될까 조심스럽지만, <안티벨룸>을 사전정보 없이 보면, mini74님 표현처럼 ˝흑인의 과거여행(?)˝을 생각하게 돼요. <킨> 읽고 싶던 책인데, 레삭매냐님께서 원작으로도 더 들어가고 싶어지신 책이라니 꼭!

레삭매냐 2022-04-25 01:30   좋아요 1 | URL
얄라알라님 감사합니다.

주신 정보로 <안티벨룸> 수배해서
바로 봤는데 정말 대단하네요.
이 영화는 쌩으로 봐야 제 맛이겠네
요. 와우!!!

버틀러 여사의 <킨>이 바로 떠올랐
습니다. 어제 도서관에서 <킨> 빌려
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