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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가족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58
고지마 노부오 지음, 김상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6월
평점 :

중고서점에 갔다. 엔도 슈사쿠의 <바보>가 타겟이었다. 그리고 알렉산다르 헤몬의 <나의 삶이라는 책>도. 그리고 덤으로 대산총서 시리즈 중의 하나인 고지마 노부오의 <포옹가족>을 데려왔다. 그런데 그 중에 제일 먼저 읽은 책은 <포옹가족>이었다. 분량이 적어서 읽기에 부담이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내 예상은 적중했고 심지어 재밌기까지 했다.
막장 드라마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다. 미국에도 그리고 일본에도 있는 모양이다. 미와 가족이 서사의 중심이 되는 <포옹가족>은 바로 그런 막장에 방점을 찍는다. 45세의 지식인으로 번역 일을 하는 미와 슌스케 씨의 마누라가 바람이 나 버렸다. 그것도 젊은 미군 청년과 함께.
그 사실을 미와 집안의 실질적인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가정부 미치요 씨가 넌지시 가장에게 불어 버린 것이다. 대판 싸우고 바로 갈라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도키코와 슌스케는 어찌어찌해서 외부인의 도래로 시작된 내분(?)을 봉합하고 다시 일상을 이어간다. 그것은 마치 일본 역사에서 흑선 내항으로 갈기갈기 찢긴 국내 상황을 대충 봉합하고 곧 대대적인 국가 개조에 나선 모양이라고나 할까. 그 때도 지금도, 충격 요인은 외부에서 왔다.
아무리 좋게 봐도 슌스케는 공처가인 모양이다. 그저 바람난 아내가 하자는 대로 집도 짓고, 분위기 쇄신을 위해 그야말로 캘리포니아 별장 스타일의 집을 지어 외곽으로 나간다. 순서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도키코가 바람이 나고 새로운 집을 지어 이사를 나갔는지 어쨌는지. 슌스케는 두 아이들은 료이치와 노리코를 위해 단란한 가정을 다시 세울 결심을 했다고 하는데, 자신 역시 외간 여자와 바람을 피운가. 비록 길게 가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집안 꼴 잘 굴러 가는구나 그래.
이번에는 분위기 쇄신을 위해 내보낸 미치요 후임으로 들어온 마사코와 아들 료이치가 정분이 나고 만다. 그리고 슌스케의 아내 도키코는 유방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받게 된다. 아니 미와 집안에는 뭔 놈의 일들이 이렇게 많이 벌어지는 거지? 우리네 일상사가 그렇긴 하지만, 미와네 집에는 행(幸)보다는 불행이 더 많이 발생하지 않나 싶다. 그나마 막내딸 노리코가 그나마 가장 정상적으로 보인다.
문제의 발단이었던 도키코는 결국 암이 폐에까지 전이되고, 병원에서 세상을 뜨고 만다. 아내가 위독하다는 말에 슌스케는 아이들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결국 사랑하는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일상이 시작된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을 살아야 한다는 엄중한 일상의 명령 말이다.
홀아비가 된 슌스케는 아내의 죽음을 애도할 틈도 없이, 딴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아내의 간호를 맡았던 니시무라 간호사에게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백화점 속옷 매장의 직원에게도 만나자는 의중을 드러낸다. 그것 참... 그리고 아내의 죽음이라는 상실을 달래기 위해 야마기시라는 동료를 집안에 들이고 예전의 내정 총사령관이었던 미치요 씨에게 다시 가정부 취업을 의뢰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방식을 써도 아내와 어머니의 부재는 채울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재혼 선언을 하고 여러 채널을 동원해서 맞선자리에 나간다. 거의 재혼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행동하는 그의 모습에 그만 진저리가 날 뿐이다.
1960년대 일본의 모습을 그렸다는 <포옹가족>에서 패전 이후, 새로운 국가 건설에 나선 일본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제대로 된 과거청산은 처음부터 이루어지지 않았고, 국민들의 생존과 안위에 앞서 국체보전이라는 이유로 국왕제를 계속해서 유지해 달라는 일본 군부의 요청을 미군이 받아들이면서부터 문제가 꼬이기 시작한 게 아닐까.
태평양전쟁 중에는 미영귀축이라는 표현으로 미국과 영국을 적으로 규정하던 나라가 패전 뒤에는 점령군으로 받들어 모시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멀쩡한 집안의 내를 취한 미군 청년 조지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다시 한 번, 일본식 동도서기론의 공허함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도대체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던 가치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처음 만나는 고지마 노부오 작가는 노골적인 시대에 대한 비판 대신, 블랙 유머를 적당하게 섞은 감칠맛 나는 칵테일 같은 서사로 패전을 딛고 고도성장하던 당시의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고지마 노부오는 태평양 전쟁 당시, 베이징 연경대학의 정보부대 출신이었다고 하는데 당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나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아메리칸 스쿨> 같은 작품들도 번역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래도 한 권으로는 아쉬우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