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독일인입니다 - 전쟁과 역사와 죄의식에 대하여
노라 크루크 지음, 권진아 옮김 / 엘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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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은 정말 은혜로운 장소가 아닐 수 없다. 자본주의 3.0 시대에 어떤 비용도 없이 수 시간을 마음껏 머물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심지어 책도 공짜로 볼 수가 있다. 목표했던 책들을 고르러 갔다가 순전히 운빨로 걸린 책이었는데, 그렇다 책 권수도 늘릴 겸 나는 종종 그림 소설을 애호한다, 아주 마음에 드는 그런 책이었다.

 

저자는 미국 파슨스 스쿨의 부교수라는 독일 퀼스하임 출신의 노라 크루크. 아니 출신지는 칼스루에였던가? 뭐 그건 중요하지 않다. 전후 독일 2세대로, 그나마 과거 청산 세대에 해당하는 저자가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 세대에 저지른 끔찍한 전쟁범죄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가족사를 통한 과거와의 화해가 담긴 그런 책이었다.

 


들어가기에 앞서 저자는 독일이 만든 세계적인 자랑거리들을 그림 소설 곳곳에 포진시킨다. 서류 보관으로 골머리를 앓는 나에게도 익숙한 바인더의 본고장이 독일이란다. 라이츠라는 사람이 만든 바인더는 정리정돈에 이골이 난 독일 사람들에게 아주 제격이었던 발명품이었다. 그리고 독일산 빵, 독일어로는 브로트라고 하던데 역시 한국 사람들에게 밥이 있다면 아마 독일 사람들에게는 브로트가 있던 모양이다.

 


그림 소설의 전반부에는 저자의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형 프란츠-카를 크루크(FKK)의 과거 행적을 쫓는 이야기다. 작은 프란츠-카를이 태어나기 전에 큰 프란츠-카를은 이탈리아 전선에서 1944년에 가슴에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수백만의 독일 젊은이들이 죽어나간 당시 일반 독일 가정의 비극이라고나 할까. 1926년에 태어난 프란츠-카를은 나치 시대의 세례를 받고 성장했다. 어린 프란츠-카를에게 나치들은 수세기 동안 같은 독일의 하이마트(heimart:고향)를 공유해온 유대인들을 독버섯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보니 퀼스하임 동네는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의 고장이기도 했다. 중세 이래, 기사들이 앞장서서 죄 없는 유대인들을 죽이는데 앞장섰다.

 


세뇌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저자가 찾아낸 큰 프란츠-카를이 남긴 그림일기나 편지 등등에 잘 나타나 있다. 농부였던 큰 프란츠-카를은 17세에 징집되어 18세에 전선에서 연합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개인적으로 놀라웠던 건, 그가 다른 부대도 아닌 바펜-SS, 그러니까 최고의 전투력을 자랑하던 무장친위대 소속이었다는 점이다. 노라의 아버지 작은 프란츠-카를은 가족과 함께 했던 이탈리아 여행에서 큰형님의 묘를 찾는다.

 

저자 노라 크루크는 브루클린에서 유대인 남성과 만나 결혼했다. 아니 어쩌면 유대인 남성과 결혼하는 것이 자신의 민족이 지난 전쟁에서 저지른 범죄와 화해하고, 어떤 면에서는 속죄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추정해 본다. 미국에서 굳이 자신의 독일 억양에 신경 쓰면서 살아야 하는 그런 에피소드들도 자주 등장한다.

 

다음 인물은 좀 더 복잡하다. 그는 바로 노라 크루크의 외할아버지 빌리 로크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수양어머니에게 내쫓겨 어려서 동생 에드빈과 험한 세상의 풍파를 헤쳐 온 사나이다. 운전 기술을 배워 유대인 동업자에게 운전 교습소 사업을 물려받은 빌리.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회민주당(SPD)에 투표하던 그가 놀라운 변신을 하게 된다.

 


이 사실을 노라 크루크는 종전 후, 미군이 남긴 기록을 통해 알게 된다. 빌리 로크는 나치 당원이었던 것이다. 131가지에 달하는 질문 중에 1위는 나치당 소속이었나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 다음 순서는 일반 친위대 혹은 무장 친위대였다. 그러니까 노라의 가족 중에는 1번과 3번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신을 동조자(미트로이퍼)라고 분류하지만, 그는 동조자보다 좀 더 심각한 단계인 부역자로 분류되었다. 과연 유쾌하지 않는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저자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운전 교습소를 운영해야 했던 빌리 로크에게 부역자라는 딱지는 치명적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자녀를 부양해야 했던 그는 필사적으로 적극적인 나치 당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미군 점령군들에게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주변의 지인들이 나서서 그를 변호했다. 특히 공인된 반파시스트 운동가였던 알베르트 W.의 증언은 결정적이었다. 비로소 노라 크루크는 안도하기 시작한다. 비록 자신의 할아버지 빌리 로크가 나치 당원이긴 했지만, 심각한 부역자는 아니었노라고.

 

다시 미국에 돌아온 노라 크루크는 작고한 알베르트 W.의 자손들과 연락을 취한다. 그리고 구원의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러니까 노라 크루크 작가가 그리고 쓰고 기록한 <나는 독일인입니다>는 결국 자기 구원에 대한 서사인 셈이다. 한사코 자신들이 전쟁 중에 저지른 가공할 만한 범죄에 대해 반성과 사과는커녕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부인하는 이들의 그것과 너무 다른 자세가 아닌가.

 


마지막에는 독일의 또다른 자랑거리로 강력접착제로 기네스 신기록을 보유한 우후(UHU)가 소개된다. 무엇이든 강력하게 붙일 수 있는 제품이지만, 과연 자신들의 끊어진 기억들도 그렇게 이어 붙일 수 있는지 저자는 담담하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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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04-19 16: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만쉐!!!!

레삭매냐 2021-04-20 09:16   좋아요 1 | URL
도서관이라는 존재에 대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붕붕툐툐 2021-04-19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진짜 은혜로운 곳!! 저도 도서관 러버라, 도서관에 투자 안하는 시와 시장에게 화가 나 있는 상태입니다.ㅎㅎㅎ
가끔 이런 뜻하지 않게 좋은 책을 만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잖아요~ 도서관 그만 가야 하는데-빌린 책은 이미 쌓여 있음- 또 갈 것만 같아 불안해요~ㅎㅎ

레삭매냐 2021-04-20 09:18   좋아요 1 | URL
제가 사는 동네 전임 시장님은 정말
도서관 뿐 아니라 소장 도서에 대해서
도 신경쓰시는 분이셨는데 지난 번에
다른 사람으로 바뀐 다음에는 그 분
이 하시던 도서관 정책들이 죄다 사라
져 버려서 그저 아쉬울 따름입니다.

온통 개발과 부동산 값만 올리라는
그리고 도서관을 독서실로 만들어
내라는 이들 때문에 기가 찰 지경이
네요.

전 오늘도 읽고 싶은 책을 하나 만나
서 일단 사기 전에 살만한 책인지 관
찰하러 가야 하나 어쩌나 싶습니다 :>

라로 2021-04-20 09:52   좋아요 2 | URL
레샥매냐님,, 이런 님의 글을 읽으면 님의 직업이 너무 궁금해져요. ^^;;;
암튼 덕분에 모르는 책을 알게 되는 좋은 점도 있지만, 어떻게 책을 고르시고 대하시는 지 종종 느껴져서 더 신뢰가 갑니다. 레샥매냐님도 만쉐!!!^^

2021-04-20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