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타르인의 사막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3
디노 부차티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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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맥스웰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에 앞서 디노 부차티의 <타타르인의 사막>이 있었다. 오래전 어느 출판사의 시리즈 가운데, 저자의 이름을 만나고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타타르인의 사막>은 이탈리아의 독재자 일 두체가 친구를 따라 전쟁에 나선지 두 번째 해인 1940년에 발표된 책이다. 저널리스트 출신 저자인 부차티는 시간과 공간을 알 수 없는 곳을 배경으로 한 소설로 파시즘 치하 아래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의 주인공은 이십대 청년 장교 조반니 드로고다. 그는 왕립 사관학교를 졸업한 다음, 중위 계급장을 달고 바스티아니 요새에 부임한다. 처음부터 그는 이것이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여행이라는 걸 직감이라도 했던 것일까. 친구 프란체스코 베스코비의 배웅을 받으며 그는 도시를 떠난다. 말 타고 도시에서 하루거리라는 요새는 이미 십년 전에 폐쇄된 곳이고, 다른 요새는 그야말로 가득히 먼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요새로 가는 길에 그는 아마도 자신의 상관으로 추정되는 오르티츠 대위를 만난다. 그는 2년의 복무기간을 생각했는데, 오르티츠 대위는 요새에서 자그마치 18년을 보냈다고 한다. 이때부터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는 걸 드로고 중위는 깨달아양 했던 게 아닐까? 아니 어떻게 18년이나 국경지대에서 수비대로 복무한 사람의 계급이 꼴랑 대위란 말인가. 왠지 바스티아니 요새가 국경의 위치한 쓸모없는 이급 요새라는 사실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기 시작한다. 북쪽 사막 너머의 타타르인을 방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요새라고 했던가.

 

어쨌든 장군이 15일마다 검열한다는 조리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오르티츠 대위. , 그곳에는 그렇다면 장군도 있는 모양이지? 거대한 고독의 마법이라는 표현이 바스티아니 요새만큼 들어맞는 곳도 없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드로고 중위는 황량한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다.

 

도시에서 외떨어진 바스티아니 요새는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는 마력의 상징이다. 마티 소령의 설득에 네 달 정도만 머물고 떠나려던 드로고 중위는 결국 요새에 주저앉는다. 그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장교와 병사들이 그와 비슷한 처지다. 그리고 요새에서 북쪽의 왕국에서 언젠가 온다는 타타르족들의 무자비한 침입을 기다린다.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는 위협은 드로고와 동료들의 존재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철저하게 전설의 타타르인들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지도 않다. 그저 낮과 밤이 서로 집어삼키는 그런 시간들을 보내는 것이다.

 

어느 순간, 주인공 드로고 중위의 모습에서 젊은 날에 무한정일 거라고 생각하고 허송세월한 나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이십대의 드로고 중위는 근 삼십년간을 오지의 요새에서 보냈다. 그의 선임자들처럼, 이제는 떠나야겠다고 하는 순간 이미 늦었던 것이다. 드로고 중위가 나라고 생각하고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그런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무엇일까? 피와 살이 튀는 전쟁터에서의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을까? 소설에서 중요한 요소로 사용되는 시간은 도도하게 흐르며 모든 것을 소멸시킨다. 시간은 드로고 중위의 젊음과 야망과 모든 것을 서서히 침잠한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언제고 소멸된다. 다만 그것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 뿐.

 

요새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한다. 말을 생포하려고 부대에서 이탈했다가 동료의 총에 라차리와 타타르인들과의 국경 문제를 매듭지으려고 산악 지대 정찰에 나섰던 앙구스티나 중위가 차례로 죽는다. 그런데 진짜 위기는 언제부터인가 타타르인들이 요새 공략을 위한 도로 건설에 나서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총사령부는 드로고 중위의 망원경 관찰을 꼭 집어서 금지시킨다. 공연히 분쟁이나 병사들의 동요를 부를 수 있는 그런 쓸 데 없는 행동을 삼가라는 걸까?

 


그러는 와중에 드로고 중위는 대위를 거쳐 소령까지 진급하지만, 도시에 사는 그의 친구들은 그가 따라잡을 수 없는 그런 사회적 성공을 거둔다. 가정도 이루고, 심지어 이르게 손자를 본 친구들도 있다. 어쩌면 자신과 결혼할 뻔 했던 마리아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이제 자신의 청춘을 바스티아니 요새에서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드로고 소령은 늙고 병들어 거동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바로 그 순간, 요새의 모든 이들이 기다린 타타르인들의 공격이 시작된다. 하지만, 요새 사령관이 된 시메오니 중령은 평생을 기다린 적과의 투쟁에 나서겠다는 드로고 소령의 마지막 소망을 거부하고 연대 마차에 태워 후송을 명령한다. 인생에서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그렇게 노병은 사라져 간다.

 

젊은 시절, 첫 배낭여행에서 호주 사막의 거대한 고독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내가 찾은 호주 사막은 기대했던 광활한 모래사막이 아니라 붉은 흙으로 이루어진 사막이었다. 가는 데마다 만나는 비슷한 처지의 배낭 여행객들 때문에 원하던 거대한 고독도 찾을 수가 없었다. 디노 부차티의 걸작 <타타르인의 사막>을 읽으면서 그 시절이 떠올랐다.


결국 우리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해결해 주거나 이해할 수 없는 자신만의 고통을 지고 사는 것이다. 드로고 중위의 삶에 내 경우를 대입해서 그의 처지에서 작은 위로를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오지의 요새에서 거대한 고독을 향유하며 결코 오지 않는 적으로 치환된 메타포로서의 죽음을 기다리는 유한한 존재인 우리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서사를 창조한 부차티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런 걸작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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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06 13: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말이 콕 박히네요. 최고의 찬사잖아요. ㅎㅎ 저는 작년에 읽었던 밀크맨에 레삭매냐님 같은 찬사를 붙였었는데 올해 타타르인의 사막을 읽으면 그 감동을 다시 받을 수 있을어같은 느낌이 드네요. 리뷰 잘 읽고 다음에 읽을 책으로 바구니에 쏙 담아갑니다.

레삭매냐 2021-03-06 13:44   좋아요 3 | URL
우연히 알게 되어 고대하고 있던
작가의 책이었는데...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예약 주문을
날렸네요.

읽을수록 고 맛이 배어나는 칡같
다고나 할까요. 나중에 다시 한 번
읽어 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moonnight 2021-03-06 16: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야겠어요. 레삭매냐님 서평에 이미 다 읽은 느낌이지만^^;

레삭매냐 2021-03-07 08:56   좋아요 0 | URL
올해의 책으로 꼽아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일독을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라로 2021-03-06 2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레삭매냐 2021-03-07 08:57   좋아요 0 | URL
이 작품을 계기로 해서 디노
부차티의 다른 소설들도 발간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