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가는 길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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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동안, 나의 눈은 언제라도 눈물샘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존 버저 작가가 섬세하게 구상한 서사를 따라가는 동안, 나의 감정은 그런 태세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깊어가는 가을에 만난 존 버저의 <결혼식 가는 길>은 그저 아름다웠다.

 

대륙을 양쪽에서 가로 지르는 황홀한 서사는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타마타(tamata:그리스 정교에서 교회에 바치는 편액)를 파는 눈먼 이야기꾼으로부터 시작한다. 평생을 철도원이자 이급 신호수로 살아온 알프스 프랑스에 사는 이탈리아 이민자 장 페레로는 죽어가는 딸에게 줄 타마를 초바나코스(양치기)에게 산다. 안 아픈 곳이 없다는 딸을 위해 타마를 산 아버지. 심장이 그려져 있는 타마.

 

소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남자 주인공 지노의 신부가 될 23세 처녀 미농 페레로가 태어나기 이전의 시절로. 장의 아내 니콜은 일찌감치 자신의 삶을 살겠노라고 선포하고 그의 곁을 떠났다. 장의 곁을 체코에서 프라하의 봄 사태로 이방인 신세가 된 기술자즈데나 홀레체크가 채운다. 그리고 미농이 태어난다. 서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갈 태세를 마쳤다.

 

주인공들은 각각 세 방향에서 슬프고 기쁜 결혼식이 열릴 베네치아의 고리노로 향한다. 장 페레로는 자신의 빨간색 혼다 CBR 오토바이를 정성스레 정비해서 긴 여정에 나선다. 다른 한쪽에서는 즈데나가 브라티슬라바에서 두 번째 서방행을 감행한다. 즈데나는 딸의 결혼 선물로 지빠귀 울음소리가 나는 피리를 주려고 시민을 찾아 나선다. 모데나에 사는 미농은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전해 듣는다.

 

우리는 알고 있다. 장의 아름다운 딸이자 신부 미농이 죽어간다는 것을 말이다. 낭트의 교도소에서 탈옥한 어느 요리사와 보낸 하룻밤이 문제였다. 정말 드라마 같은 사연이 아닌가. 그리고 나서 미농은 노점상하는 청년 지노(루이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미농은 자신이 HIV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룻밤의 불장난으로 자신의 삶 그리고 어쩌면 지노까지도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는 미농은 자책한다. 미농의 친구 마렐라는 인류에게 내려진 최악의 역병을 SIDA(프랑스어로 에이즈를 의미한다)라고 부르지 않고, 레트로바이러스 혹은 스텔라라고 부르며 그녀를 위로한다.

 

아마 스텔라가 없었더라면, 지노는 미농과의 결혼을 서두르지 않았으리라. 자신의 미래를 잘 아는 미농은 지노에게 자신을 떠나라고 하지만, 사랑에 눈먼 청년 지노는 결별이 아닌 결합을 선택한다. 베네치아의 고리노에 가서 결혼하겠다는 것이다.

 

그 결과, 모단과 브라티슬라바에서 장과 즈데나의 재회를 위한 로드 트립이 시작된다. (la strada)에서 그들은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우리네 삶은 직선적이다. 지구별에 도착한 인간들은 언젠가는 모두 죽을 운명이다. 지노에게 미농과 결혼을 말리는 페데리코의 말처럼 그게 언제인가의 문제일 뿐이다. 생 장 드 모리엔의 철도사고처럼, 누군가는 예상보다 이른 죽음을 그리고 또 누군가는 천수를 누릴 뿐. 존재가 소멸하는 순간이 어디에 있는지 어느 누가 알 수 있을까. 어쩌면 애써 눈 감은 채, 삶이라는 이름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탈리아 페라라의 고리노 광장에서 치러지는 결혼식은 아름다우면서도 슬프다. 결말의 곳곳에서 계시처럼 등장하는 사위어가는 미농의 마지막 순간들에 대한 묘사는 읽기내기가 쉽지 않았다. 미농과 지노의 결혼식에 준비된 농어와 장어 요리로 대변되는 삶의 최고의 순간들과 어쩌면 그렇게 대조가 되는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삶의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은 본질적으로 같은 게 아닐까? 그래서 삶은 순수한 미스테리오소인지도 모르겠다.

 

유유자적하게 슬픔을 안고 도로를 달리는 장 페레로의 모습은 우리 보통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다. 평생을 고지식한 신호수로 살아온 사람답게, 도로에 사람이 없어도 신호를 준수한다. 외롭게 오토바이에 한 대에 의지해서 먼 길을 나선 장의 모습에서는 일견 구도자의 모습이 보인다. 장은 살아남기 위해 실리콘 형제애를 내세운 해커 집단의 활동명 세례 요한을 만나기도 한다. 즈데나는 베네치아로 가는 길에 만난 대머리 아저씨 토마스를 (구원하기) 위해 사비를 털어가며 버스를 잡아둔다. , 그렇게 모두가 구원을 원하고 서로를 구원하는구나 싶다. 조금 신파스러운 맛이 없진 않다 사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유행으로 개인들의 일상이 무너진 세상에 사는 우리들에게 4반세기 전에 발표된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알 수도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로 가득한 세상의 삶이 순수한 미스테리오소라는 점 말이다.


[뱀다리] 존 버저의 <결혼식 가는 길>1999년에 해냄에서 이윤기 씨의 번역으로 <결혼을 향하여>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번에 나온 <결혼식 가는 길>은 재개정판인 셈이다. 출판사가 다르긴 하지만, 이 정도는 서비스로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닌가. 동업자 정신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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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10-23 1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좀 봐야겠군요.ㅋㅋ

레삭매냐 2020-10-24 13:57   좋아요 1 | URL
간만에 만나는 존 버저의 책, 반가웠습니다.

페크(pek0501) 2020-10-23 2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존 버거를 존 치버로 알았다는... ㅋㅋ
204쪽이라 맘에 드네요.

레삭매냐 2020-10-24 13:57   좋아요 1 | URL
분량이 적어서 수월하게
읽었습니다.

내용은 기대이상이었구요.
추천해 드립니다.

비연 2020-10-24 0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존 버거. 애정하는 작가. 소개 감사요~

레삭매냐 2020-10-24 13:58   좋아요 0 | URL
저도 팬인지라 존 버저의 책들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수급이 쉽지가 않네요 다들 애정
하는 작가의 책들이라 그런지.

초딩 2020-10-31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존 버거네요~
저 결혼식 가요

레삭매냐 2020-10-31 21:56   좋아요 0 | URL
오 책 제목과 딱 떨어지는 상황이시네요 :>

코로나 시대의 웨딩은 어떨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