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송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
율리 체 지음, 장수미 옮김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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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에도 마스크를 쓰는 모습이 뉴노멀이 되어 버렸다. 코로나 팬데믹 시절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의 건강과 위생이 중요시되고 있다. 코로나 덕분에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위생에 철저하다. 수시로 손을 씻고, 마스크로 무장해서 어지간한 감기는 걸리지 않게 되었다. 물론 반대급부도 막심하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달궁 독서모임이 열리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불만이다.

 

요즘 흠뻑 빠진 법학박사님 율리 체가 드디어 자신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법학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 바로 2009년에 발표된 5번째 소설 <어떤 소송>이다. 아예 제목에서부터 어떤 소설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고 도발한다. 우리의 주인공은 34세의 생물학자이자 허무주의자인 미아 홀. 그녀는 최근 사랑하는 동생 모리츠(27)를 잃고, 상실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방법적대적인 책동을 자행했고, 독성 물질을 남용했다는 혐의로 기소된다. 가볍게 끝낼 만한 사건이 변호사 루츠 로젠트레터의 부추김으로 판이 커진다.

 

, 그전에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을 빼먹었다. 21세기 어느 시절로, 당대 최고의 가치는 바로 건강이다. 살아 숨 쉬는 모든 존재들은 고통을 피하고, 생존에 적합한 상태를 원한다. 이 명제를 인간에 대입해 보자면,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어떠한 종류의 고통도 원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미래사회에서 최고의 덕목은 바로 건강이다. 미아와 그녀의 동료들 혹은 적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경찰국가 비슷한 시스템을 가동시킨다. 그것을 방법주의라고 했던가.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자연주의자 미아를 옥죄는 사회는 그녀의 건강을 지나치게 염려한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압박한다고 해야 할까. 모든 사회 활동은 모니터링되고, 일체의 독성 물질 남용은 법에 저촉되는 행위로 간주된다. 미아는 독성 물질을 흡입하는 방식으로 사익을 추구하다가 경찰에 체포된다. 아니 이미 그전에 미아는 병날권(병날 권리)’을 주창하는 잠재적 테러리스트의 일원 혹은 동조자로 요주의 인물이었다.

 

당대의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의 현실세계에서 술이나 담배 같은 중독성 강한 기호식품(?)들이 시중에서 아무런 규제 없이 팔린다는 점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향정신성 약물들은 엄격하게 규제하면서 그에 못지않은 강력한 중독성을 지닌 상품들이 즐비한 마트의 매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쨌든 무엇보다 건강을 최우선시하는 방법주의 사회는 개인에게 최선의 건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운동을 강제한다. 그들은 개인 복리와 보편적 복리를 위한다는 슬로건으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심지어 원하지 않는 행동을 강제한다. 어쩌면 이런 설정 자체부터가 넌센스인 지도 모르겠다.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는 소설에서 다루는 여러 가지 주제들을 담으려다 보니 나 자신도 헷갈릴 판이다. 자유 의지를 억압하는 감시사회에 대한 이슈부터 시작해서, 사회의 모든 갈등을 법으로 심판하려는 법치 만능주의 그리고 진실을 전달하는 언론의 순기능보다 선동을 일삼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문제적 인간이자 이야기 사냥꾼인 하인리히 크라머에 대한 캐릭터 분석에 이르기까지 정말 입맛 당기는 주제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한다.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달궁 독서모임책으로 다룰 만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누가 미아 못지않은 자연주의자이자 젊은 쾌락주의자였던 청년 모리츠는 소개팅으로 만나려고 했던 지뷜레의 살인혐의 누명을 쓰고, 구치소에서 자살한다. 주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장면으로 이상적 애인이 미아의 삶 속에 침투하는 장면도 나온다. 모리츠의 자살 도구였던 투명한 낚싯줄은 미아가 몰래 제공했다는 점도 놀랍다.

 

미아는 명백하게 경계선에 선 중간자 같은 존재다. 중세였다면 그녀는 마녀라고 비판받았으리라. 자연과학자로 건강을 최우선시하는 방법이 지배하는 사회의 대의에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자유 의지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방법안기부에서 엄격하게 금지한 독성 물질을 즐긴다. 그런 점에서 병날권의 신봉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

 

변호사 루츠 로젠트레터의 활약으로 모리츠가 어려서 가졌던 병력을 바탕으로 그의 무죄를 밝혀내는데 성공하면서, 미아는 모두의 지탄을 받는 마녀에서 방법의 허점을 만천하에 드러낸 영웅으로 등극한다. 하지만, 하인리히 크라머로 대변되는 기득권 세력의 반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은 진실을 앞에 내세우고 공공의 복리라는 대의를 위해, 개인의 복리나 안위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말 역설적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크라머가 이야기 사냥꾼이자 언론인으로 플레이어가 되어 선동가로 직접 판에 참가했다는 사실이다. 노련한 플레이어는 사실의 주작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오늘날의 기레기라는 악명을 뒤집어 쓴 언론의 모습과 일치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율리 체는 마땅히 선각자이자 예언가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크라머가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덫에 걸린 미아는 결국 법정 최고형인 무지 동결형에 처해진다. 다시 사태는 반전되어, 감방 밖에서 그녀의 무죄를 주장하던 이들은 그녀에게 기꺼이 돌팔매를 하겠다고 신속하게 태세전환에 나선다. 방법에 도전한 위대한 순교자의 반열을 들려는 마지막 순간까지 반전이 거듭된다. 대단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아니 벌써 율리 체의 마지막 책이라니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출판사들은 속히 그녀의 소설들을 내주기 바란다. 지난 20년 동안 12권의 책을 발표했는데, 지금까지 나온 책은 4권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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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10-14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감시하는 사회라는 글을 읽으니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런 사회에서도 몰래 연애를 하는데 그것도 들통이 나서 처벌을 받게 됩니다. 꼭 북한을 보는 것 같았었죠.

레삭매냐 2020-10-14 20:09   좋아요 1 | URL
개인의 복리를 위한다는 이유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의 역설
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더라구요.

키스 같은 행위에 대해서도 소설의
배경이 되는 사회에서 최고의 가치인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는 논리로 배척
하는 풍조가 색다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술과 담배를 독성 물질로 규정하고
남용하는 이들을 처벌하는 시스템도
참신했습니다.

han22598 2020-10-15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번역가님들 좀더 힘을 내주셨으면 좋겠네요 ^^나머지 8권도 빨리 번역해랏! 번역해랏!

레삭매냐 2020-10-17 22:59   좋아요 0 | URL
아마 율리 체 작가의 이름이 주기적
으로 노출이 되어야 출판사에서
그나마 움직이지 않으려나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