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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8
율리 체 지음, 이재금.이준서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추석 연휴 때, 율리 체의 <새해>를 지인에게 추천해 주었다. 나도 읽지 않은 책이기에 추천하고 나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데 이 작가가 완전 내 스타일의 그런 작가가 아니던가. 독일 사람들은 모두 스페인령의 카나리아 제도 란사로테 섬으로 휴가를 가는 모양이지를 <새해>를 읽다 말고 만난 <잠수 한계 시간>에서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율리 체 작가의 책 수집에 나섰다. 물론 그 순간까지도 다 읽은 책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항상 어느 작가에 빠지게 되면 일단 그 작가의 책들부터 모으는 요상한 습성이 있다.
비교적 신간인 <새해> 말고는 모두 모클 시리즈로 나왔는데, 이제 수명을 다한 모클의 운명처럼 그동안 나온 책들 역시 품절과 절판의 운명으로 치닫고 있었다.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율리 체의 책들을 모았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 컬렉션은 3일 전, 도토리 책방에서 득템한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제 새로운 율리 체 작가의 책이 나오지 않는 이상 그녀의 책을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을 것 같다.
<새해>에서는 왠지 나의 비밀스러운 내적인 감상들과 만나는 그런 추체험을 하기도 했다. 뭐랄까 나의 약점을 잡힌 듯한 그런 느낌? <잠수 한계 시간>은 매혹적이고 오래전에 실패한 패다이 자격증 실패의 쓰라린 추억을 되살리는 통에 잠시 접어 두었다. 그리고 나서 제바스티안과 오스카 두 천재 물리학자들의 치열한 삶의 배틀을 다룬 <형사 실프>에 도달했다. 이 책은 지난 3일에 걸쳐 집중적으로 시간을 투자한 끝에 다 읽는데 성공했다. 내가 처음으로 다 읽은 율리 체 작가의 책으로 기록될 지어다.
예나 지금이나 시간의 본질을 다룬다는 그리고 우리네 삶의 본질을 추구한다는 양자 물리학의 세계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도 그리고 이해가 가능하지도 않는다는 생각하는 그런 인간이기에 내가 이 책에서 법학 박사님이 다루는 썰들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부터 들었다. 그런 점에서 소설을 1/3 정도나 읽어야 비로소 등장하게 되는 주인공 형사 실프 아저씨의 미친 존재감에 그저 격한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노라고 이 자리를 빌어 공감한다. 실프 아저씨는 자신의 아들 리암의 실종 신고를 했으나, 곧바로 아들에게 아무런 위해가 없었다는 제바스티안을 찾아가 사건의 본질이 아닌 시간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내던진다. 그리고 그는 어쩌면 살인범일 수도 있는 유력한 용의자에게 깊은 존경심을 표하기 시작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간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에게 현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 하나 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우리가 현재라고 생각하는 순간들은 곧바로 과거로 치환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과거의 1초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이미 지나간 과거를 현재로 퉁치는 그런 오류의 신봉자라고 해야 할까.
나 같은 범인(凡人)은 도저히 바젤의 천재 물리학자 오스카 씨가 구사하는 양자 물리학의 이론적인 세계에는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오스카가 자신의 연인인지 친구인지 헷갈리는 천재-엘리트의 자리에서 지상으로 강림해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아내 마이케와 아들 리암과 보통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제바스티안을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평행 우주로 되돌리려고 하는 노력이 문제라는 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율리 체 작가가 구사하는 내러티브 구조는 어느 순간 나에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도대체 우리가 궁금해 하는 시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고나 할까. 나머지들은 그저 소설의 외양을 갖추기 위한 부수적인 요소들일 뿐이라는 생강이 들었다. 하나의 구색 맞추기라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유괴된 아들을 되찾기 위한 스릴러물로서 <형사 실프>에 던지는 질문들이 하나같이 실종되어 버렸다. 도대체 누가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바스티안과 마이케의 아들 리암을 캠프에 데려다 주었는가.
작가가 교묘하게 배치한 의료계 스캔들 역시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후반에 가서야 알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해,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한 율리 체 작가의성공한 교란작전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프라이부크르에서 벌어진 의료계 스캔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다벨링의 살해 사건은 그저 우연이 일치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보면 유물론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인류의 존재부터 몇 번이나 되는 자승의 우연이 반복되어야 실존이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천재들의 세계에서 보통 사람의 층위로 내려오길 원하는 제바스티안이 지닌 창조에 대한 생각에 수긍이 간다. 도서관에서 그의 논문을 읽고, 요즘으로 치면 너튜브에서 동영상으로 제바스티안의 생각에 동조하게 된 실프 형사(독일어로 그의 이름은 ‘갈대’를 의미한다고 한다)의 좌충우돌하는 모습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하나의 밸런스라고 해야 할까? 두 명의 물리학자들이 세상의 비밀을 품은 공간과 시간의 본질에 대해 치열한 정신세계의 배틀을 벌인다면, 누군가는 피지컬한 허드렛일도 담당해야 하지 않을까. 스승 격인 실프 형사와 오로지 수사만 들입다 파는 제자 리타 스쿠라의 티격태격하는 장면이 후자를 갈음한다.
실프 형사가 양자 물리학 그리고 시간의 본질에 대해 설명과 나름의 리서치를 했음에도 완벽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던 것처럼, 나 역시 <형사 실프>에서 잘난 율리 체 작가가 구사하는 내가 모르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서술을 다 이해했노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서사도 마찬가지. 다만, 현재라는 시간이 원칙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아이디어 하나는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두고두고 써먹어야지. 그리고 소설의 곳곳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법학 박사님이 창조해낸 문장들의 광휘에 그만 반해 버렸다. 법조인으로 활동하면서도 이렇게 멋진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서 두 잘난 인간들의 자의식이 강렬하게 맞부딪혔던 예의 여러 차원의 평행 우주의 존재가 가능하다는 걸 입증하는 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남은 율리 체 작가의 세 권의 책들 <어떤 소송>, <새해> 그리고 <잠수 한계 시간>을 마저 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