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부터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읽기 시작했다.

시작은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사게 된 1권 때문이었다. 이건 마치 오래 전, 김용 선생의 무협지를 읽는 그런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전에 앞서 자그마치 17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들여 쓴 저자 야마오카 소하치에 대해 할 말이 있다. 아주 어려서 전사에 관심이 있어서 종군기자 출신이라는 어느 저자의 <태평양전쟁> 5권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 작가가 바로 야마오카 소하치였다. 아무리 좋게 이야기해도 그는 일본의 극우정치에 동조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태평양전쟁은 미국의 강압적인 태도로 개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했고, 전쟁 당시 일본군이 아시아 각처에서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사과도 없었다. 그놈의 황군 타령은 정말 지긋지긋했다. 그가 찬양해 마지않았던 일본 제국의 황군은 우리에게는 원수같은 존재였다.

 

그런 작가가 전후 변신해서 평화의 시대에 대한 염원이 담긴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사실을 유념에 두고 책읽기에 나섰다. 역시 씁쓰름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가 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센고쿠 시대라는 100여년에 걸친 난세를 평정하고 에도 바쿠후를 연 천하인바로 그 사람이다. 소하치 작가는 그의 탄생에 앞서 오와리의 오다 가문과 스가루의 이마가와 가문 사이에 껴서 생존을 도모하던 비참한 운명의 마츠다이라 가문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32권에 달하는 대작을 시작한다.

 

훗날 이에야스가 되는 타케치요의 조부 기요야스는 센고쿠 시대를 주름잡은 오다 가문과 전쟁을 벌이던 중, 20대의 포로가 되어 죽음을 맞는다. 어린 나이에 마츠다이라 가문의 가독을 상속받은 이에야스의 아버지 히로타다는 난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그릇이었다. 형제들끼리 분쟁은 물론이고,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도대체 분별이 가지 않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시절이었다. 조부 기요야스는 카리야성의 미즈노로부터 아이를 다섯이나 낳은 케요인을 자신의 아내로 맞는 기행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히로타다의 아내가 되는 오다이(이에야스의 생모)는 바로 그런 케요인과 미즈노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막장 드라마 쯤 되지 않을까 싶다. 이웃의 오와리와 스루가 사이에 낀 미카와국의 오카자키의 운명은 두 강대국 사이에서 어느 편에 서지 않으면 일족의 운명을 담보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이마가와 편에 섰는데, 그렇기 때문에 오와리 침공의 최선봉에 서야 하는 그런 운명이었다. 동시에 떠오르는 태양 같은 오다 가문의 침공을 온 몸으로 막아내야 했다.

 

히로타다는 성주로서 부족한 자질 때문에 가신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그런 심약한 인물이었다. 차라이 아버지 기요야스 같은 기개라도 있어야 했는데 그조차도 부족했다. 처음에는 원수의 딸이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맞이한 정실 오다이와 이혼을 압박하는 이마가와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자신의 적자 다케치요를 낳은 오다이와 결국 이혼한다.

 


그동안 훗날 전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영걸 오다 가문의 적장자 킷포시(훗날 노부나가)도 등장해서 오다이와 다케치요와의 기묘한 인연도 등장하고, 오다 가에 빼앗긴 오카자키의 거성 안죠 성 공격에 나선 히로타다를 대신해서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혼다 헤이하치로의 스토리도 비장하게 명멸한다. 나고야의 멍청이라 불렸던 킷포시는 어려서부터 일절의 관습이나 전통 따위는 거부하고 오로지 실질과 전광석화 같은 판단력 그리고 도무지 어린 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어린 호랑이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물론 주인공이 다케치요기에 킷포시에 대한 이야기들은 맛보기 양념 정도로만 등장한다. 아마 작가가 오다 노부나가를 다룬 다른 작품에서는 좀 더 심도 있게 그리고 있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다케치요가 3살이 되던 해, 어머니 오다이가 아버지 히로타다와 이혼하게 되고 또 6살이 되던 해에는 슨푸의 인질로 가게 되는 결정이 내려지면서 미래의 천하인의 운명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잔불 신세가 된다. 이미 오다이의 오카자키행에서 이미 기습의 실력을 보여 주었던 오다 가가 미래의 오카자키 영주 다케치요의 슨푸 행을 막기 위해 납치해서 오와리의 인질이 되기도 한다. 적군의 인질로 언제 죽을지 모를 운명의 다케치요를 지키기 위해 이제 다른 남자의 부인이 된 오다이와 할머니 케요인이 나서서 구명에 나서는 장면들은 아마도 작가의 상상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훌륭하게 짜인 구성이었다.

 

다케치요 호송에 나선 오카자키의 가신(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은 주군의 놀이친구이자 시종으로 나선 가신들의 자제들에게 다케치요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살아서 오카자키 땅을 밟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주군의 호송에 실패한 그는 현장에서 장렬하게 자결하면서 오카자키 사나이의 기백을 적에게 보여준다.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곳곳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듯이 마츠다이라 일족의 힘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닌, 일족의 철석같은 단결이라는 점을 저자는 고집스럽게 기술한다.

 

혼다 헤이하치로의 경우처럼, 할아버지는 주군을 대신해서 전장에서 전사했고, 아버지 혼다 역시 안죠 성 공격에 나섰다가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오카자키의 수많은 무사들이 남편과 형제 그리고 자식들을 전장이 이슬로 잃어 가면서도 언젠가 가문을 부흥할 수 있을 거라는 신념으로 히로타다 사후, 이마가와 가문의 성주 대리가 오카자키를 실제로 지배하는 동안의 수모를 견뎌냈다.

 

결국 안죠 성 공략에 성공한 오카자키-이마가와 연합군은 오다 노부히데의 서장자를 포로로 잡아 다케치요와 인질 교환하는데 성공한다. 다케치요 12년 인질 생활의 두 번째 서막은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지배하는 슨푸 성으로 무대를 이동한다.

 

킷포시가 오다 노부히데의 뒤를 이어 오와리의 가독이 되어 가는 과정, 다케치요가 이마가와의 조카 사위가 되어 가는 과정 등 정치 군사 뿐만 아니라, 센고쿠 시대를 주름 잡은 인물들의 애정 문제에 대해서도 소하치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오다에게 히라테 마사히데라는 훌륭한 스승이 있었다면, 다케치요에게는 역설적으로 자신을 인질로 잡은 이마가와 가문의 총대장 타이겐 셋사이 선사가 있었다. 내가 보기에, 소하치 작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전란의 시대를 끝내고, 평화의 시대를 연 인물로 그리고 싶지 않았나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훗날 신군으로 추앙되는 영웅의 유년 시절을 전형적인 온갖 환난을 극복하고 난세를 이겨낸 영웅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보기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시대가 만들어낸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일 뿐인데 말이다. 나의 라이벌이 강할 때에는 그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고개를 숙인다. 자신과 상대가 되지 않는 무력을 가진 오다 노부나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강성할 때는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신종을 맹세하지 않았던가. 그러다 권력에 미세한 균열이 보이기 시작하면, 배신도 서슴지 않는다.

 

자신을 주군으로 믿고 따르는 오카자키 백성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셋사이 선사가 임종하면서 내린 숙제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처자를 버릴 수 있다고 강변하지 않았던가. 실제로 오다가 훗날 자신의 맏아들 부부에게 자결을 명했을 때도 인내와 굴종을 대망을 위한다는 이유로 감내하지 않았던가. 소설에서 내내 강조되던 신의나 무사도 같은 허망한 이데올로기를 가장 신랄하게 짓밟은 주인공이 어쩌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는 점도 소설이 짚어내는 역설일 지도 모르겠다.

 

십대 소년에 불과한 다케치요의 애정 전선 이야기도 신박하게 다가온다. 아무리 훗날 천하인으로 모두가 혀를 내두를 만한 배포를 자랑하는 오카자키의 어린 성주라고 하더라도 당시 절대 권력을 지닌 이마가와 요시모토 앞에서 방약한 태도를 보이는 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의 가신들이나 스승들은 그에게 무엇을 가르쳤단 말인가. 어쩌면 이런 에피소드 모두가 영웅은 어려서부터 비범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느닷없이 어느날 갑자기 자신이 사랑한다고 고백한 카메히메 그리고 츠루히메(훗날 자신의 아내가 되는 세나히메)와 차례로 애정을 나누질 않나. 어려서부터 천하를 집어 삼킬 만한 배포를 가진 그런 인물이었단 말인가. 천하인이라면 보통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그런 큰 짐을 질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처럼, 어머니 오다이와 할머니 케요인의 기원 그리고 오카자키의 모든 사람의 희생을 담보한 미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밑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쨌든 소하치 작가는 문단의 축복이니 어쩌구 하는 찬사를 받은 작가처럼, 독자의 감성을 말랑말랑하게 만들고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기술 하나는 끝내준다. 아무래도 여러 신문에 연재된 소설이라 그런진 몰라도 다음 회를 기대하는 만드는 그런 재주가 있다고나 할까. 센고쿠 시대라는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이 허용되는 그런 시대적 상황, 가문의 영속이라는 그들이 말하는 대의를 위해 배신과 음모, 충성, 헛된 애정 관계 그야말로 인간사에 적용되는 모든 것들을 품은 이야기가 어찌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 있을까.

 

3권의 말미에 등장한 바늘장수 코자루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와 만나게 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비범한 인물은 역시 자신 만큼이나 비범한 인물을 바로 알아 보는 모양이다. 드디어 오다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의 흥망이 걸린 오케하자마 전투 격돌을 그린 4권에 진입했다. 앞으로도 28권이 남았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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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08-02 1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대망>으로 번역된 판본으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섬세한 인물 묘사와 무사도가 인상적인 작품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수시로 이름을 바꾸는, 심지어는 성(姓)까지도 바꾸는 통에 인물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제일 어렸웠던 것 같아요, 레삭매냐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

레삭매냐 2020-08-02 13:47   좋아요 2 | URL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주인공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경우만
해도,

마츠다이라 다케치요,
마츠다이라 모토노부,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3권 읽었는데 이름이 세번 바뀌었네요.

아명으로부터 출발해서 이름이 서너
차례 바뀌는 건 기본이더군요.
뭐 책은 재미있으니...

stella.K 2020-08-02 14: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저도 초등학교 땐가 아버지가 대망 세트 들여놓으셨던 기억 납니다.
한 20권 됐던 것 같은데...
저는 감히 못 읽을 것 같아 쳐다보지도 않았고 후에 <후대망>인가?
그건 이 대망과는 상관없는 기업 기업 소설이었던 것 같은데
그거 2권까지 읽은 기억 나네요.
그냥 대망이든 후대망이든 있을 때 못 읽은 게 아쉽네요.
이사 올 때 버리고 온지라...
그렇게 이름을 많이 바꾸다니 저 같으면 빡쳤을 것 같습니다.ㅋㅋ

레삭매냐 2020-08-02 22:00   좋아요 1 | URL
예의 20권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어느 출판사의 불법출판물이 아닌가
조심스레 추정해 봅니다.

저작권법이 다 무어냐는 식의 배짱
에 기가 찰 지경이지요.
왜 아직도 도서관에 불법출판물을
소장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더
군요.

개인적으로 소하치 작가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구성하고 고사
를 끼워 맞추는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살짝 들었습니다.

coolcat329 2020-08-02 1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 아버지도 대망을 들여놓으셨던 기억이 나네요. 저는 물론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요. ☺

레삭매냐 2020-08-02 22:10   좋아요 0 | URL
저도 아주 오랫 동안 무관심하다가
영어의 몸이 되신 분께서 일독하신
말에 불끈하야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책은 댑따 재밌네요.

그냥 2020-08-08 2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뭐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잘하셨나 싶어 혼자 감탄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읽었던 사람으로 한동안 읽다보면,
어느싯점에서 나가 떨어지는 구간이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저도 그랬거던요. ㅎ ㅎ 앞으로도 읽으신 부분 정리 좀 해주세요.

레삭매냐 2020-08-09 07:36   좋아요 0 | URL
말씀해 주신 대로 아무래도 원체
방대한 분량이다 보니 내쳐 달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에 다른 책들도
계속 만나고 있어서요.

일단 9권 1부까지 목표로 삼고
그 다음에는 되는 대로 가는 것으로.

응원 버프 받아 계속 달려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