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끝까지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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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곁을 떠나 하늘의 별이 된 작가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소설을 읽었다. 모든 마지막은 언제나 슬픈가 보다.

 

4년 전 발표된 루이스 세풀베다의 <역사의 끝까지>1994년 발표된 <귀향>의 시퀄이다. 전작에 등장한 후안 벨몬테가 다시 침묵 속에서 소환되어 나온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세풀베다 작가를 추모하는 재독 프로젝트를 가동하면서 가장 읽어 보고 싶던 책이었는데 결국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못 읽었다. 결국 어제 예전에 써둔 리뷰로 대강의 줄거리를 갈무리했다.

 

이번 <역사의 끝까지>에서 빌런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바로 역사의 곳곳에서 반동의 주역이었던 크라스노프 집안의 아타만들이다. 우선 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 지도자였던 카자흐 아타만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크라스노프가 등장한다. 세상에, 그는 레프 트로츠키가 적군을 이끌던 시절의 악당이 아니었던가. 두 번째 세계대전 와중에는 카자흐 독립국가를 약속한 히틀러의 제3제국에 속아 카자흐 기병단을 이끌고 참전하기도 했었다. 그들을 조국의 배신자로 규정한 스탈린에게 카자흐 사람들은 참혹한 보복을 당했다.

 

세풀베다는 북위와 남위의 여러 곳을 넘나들며 시공을 뛰어넘는 대서사시를 구축한다. 볼가강으로 차리친에서 모스크바, 뮌헨 같은 북반구 도시들은 물론이고 남반구에서는 칠레의 산티아고를 중심으로 느와르 스타일의 박진감 넘치는 내러티브가 전개된다. 슈타지 출신 스위스인 오스카 크라머는 66세의 은퇴한 게릴라 전사 후안 벨몬테가 거절할 수 없는 부탁으로 최근 칠레에 잠입한 5인조 악당들의 거처를 파악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동지 페드로와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줄 수 있는 연인 베로니카를 안전하게 피신시킨 벨몬테는 영문도 모른 채 위험한 사내들을 쫓는 추격전에 나선다. 아마 전작 <귀향>에서도 이 게릴라 전사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이 소개되었겠지만, 세풀베다의 마지막 소설에서도 볼리비아 정글에서 신화가 된 체 게바라와 함께 민족해방 전선의 일원으로, 조국 칠레에 돌아와서는 박사님 아옌데와 함께 위대한 투쟁에 나섰던 화려한 전력들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참담한 실패를 경험한 벨몬테는 비야 가리발디의 인간백정 미겔 크라스노프(맞다 그는 처음에 소개된 표트르의 손자였다)의 희생자였던 연인 베로니카의 생사여부도 모른 채 조국을 떠나야만 했다. 소련으로 건너간 그는 로디온 말리놉스키 군사 학교에서 뛰어난 저격수 훈련을 받기도 했다. 그 뒤에는 1979년 니카라과의 소모사 정권에 대항하는 산디니스타 운동에 시몬 볼리바르 국제 여단의 일원으로 참전해서 마나과 해방전에서 영웅적인 활약을 펼치기도 했었다. 뭐 이 정도면, 라틴아메리카 혁명운동에 있어 레전드급 활약을 한 투쟁가라는 타이틀이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비록 은퇴한 게릴라 전사이긴 하지만 그의 실력을 잘 아는 노회한 크라머는 그를 이용해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이 모든 것을 움직이는 평범한 자본주의 국가로 변신한 러시아와 칠레간의 통상에 저해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고자 한다. 무려 20개에 달하는 반인륜적 범죄로 144년에 달하는 징역형을 선고받은 인간백정 미겔 크라스노프를 자신들의 마지막 아타만(대장)으로 인정한 카자흐 과격주의자들이 그를 코로디예나 교도소에서 탈출시키려는 무모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카자흐 3인조들의 조력자로는 벨몬테의 소련 시절 옛 동지였던 에스피노사와 살라멘디(이고르)가 참전했다.

 

사실 세풀베다는 처음부터 <역사는 끝까지>가 추구하는 명확한 서사의 방향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미겔 크라스노프라는 악당이 저지른 추악한 범죄가 네 명의 칠레 동지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는 지점에 가서야 비로소 저자가 그린 원대한 계획을 볼 수가 있었다. 결말은 다소 기대에 미치지 못하지만, 수십 년 동안 사랑하는 조국을 떠나 망명자였던 세풀베다식 엔딩이라고 해야 할까.

 

<역사의 끝까지><귀향>과 더불어 <우리였던 그림자>까지 포함한 삼부작이다.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이나 자신의 안위 따위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던 일단의 열혈 청년들이 반세기가 지나 돌아보는 조국의 현실에 대한 고찰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들은 더 이상 사르트르나 프란츠 파농의 저작들을 읽지 않고, 손 안의 휴대폰을 조작하느라 정신이 없지 않았을까. 무심한 자본주의의 가면은 모든 것을 돈이 대신하는 그런 사회로 만들어 버렸다.

 

개인적으로는 어설픈 타협 대신 노장 벨몬테의 화끈한 복수를 원했지만, 작가가 구상한 결말은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어쩌면 이런 식의 타협이 최선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이제는 더 이상 루이스 세풀베다의 신작을 만나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슬프다.


[뱀다리] 소설 도중에 오데사 프로젝트에 대한 언급도 등장하는데, 하도 성급하게 리뷰를 쓰다 보니 그 부분에 대해선 아예 언급도 하지 못해 아쉽다. 다시 쓰려기 귀찮아서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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