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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적 킬러의 고백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품절

[세풀베다 다시 읽기 프로젝트 No. 4]
보통 책을 순서대로 읽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역순으로 읽어 보았다. 세풀베다 다시 읽기 프로젝트의 네 번째에 해당하는 <감상적 킬러의 고백>은 이미 그전에도 두 번 읽었었다. 개인적으로 내가 세풀베다 최고의 책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책이다. 이 책에는 두 개의 경장편이 실려 있는데 이번에는 두 번째 <악어>부터 읽었다. 원제는 아마 <야카레>일 것이다.
구글로 야카레 케이만을 검색해 보니 아마존 푸른 지옥에 산다는 작은 악어 사진이 화면을 채운다. 소설의 시작은 기대한 ‘푸른 지옥’이 아니라 이탈리아 최고의 산업도시 밀라노다. 그리고 브루니 피혁회사의 회장 돈 비토리오 브루니가 의문을 죽음을 당한다. 암살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를 죽였을까 과연? 사건 해결을 위해 형사들과 헬베티카 보험회사 직원 다니 콘트레라스가 나선다. 그런데 형사는 그렇다 치고 보험회사 직원은 뭐냐고? 돈 브루니가 엘 판타날/마토 그로소에 산다는 (주술사) 마나이 이름으로 100만 (스위스) 프랑짜리 생명 보험을 들었단다. 보험사는 그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밝혀내야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을 수 있다. 지극히 자본주의적 접근방식이 아닌가.
사건은 비교적 간단하다.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한 브루니 피혁회사는 원가 절감을 위해 쿠바나 이집트에서 생산된 원재료 대신 저렴한 아마존에 서식하는 야카레 악어를 선택한 것이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야카레 악어는 태초부터 아나레 족과 함께 한 그런 존재였다. 야카레 악어가 멸종되면, 아나레 족 역시 전멸될 것이다. 밀렵꾼 실러가 나서서 야카레 악어 사냥에 저항하는 원주민들을 몰살시킨다. 이에 야카레 가죽을 뒤집어쓴 아나레 전사들이 복수에 나선다는 설정이다.
정말 전형적인 누아르 스타일의 소설이 아닌가. 소설을 하드캐리하는 다니 콘트레라스는 친절하게 셜록 홈즈 같은 전후과정에 대한 해박한 이해로 사건의 본질에 접근한다. 부르주아 브루니의 친구이자 동업자 돈 카를로의 저택에 침투한 암살자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라는 것도 그의 추리로 밝혀진다. 다시 한 번 환경보존에 대한 세풀베다 작가의 명징한 메시지가 드러나는 순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냥 그들이 살고 싶은 방식으로 살게 내버려두라. 그깟 악어가죽으로 만든 지갑이나 벨트 혹은 가방 같은 사치품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마 맹신적 소비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에게는 그다지 반향이 없을 것 같지만.
제작 상의 문제 때문에 책이 페이지 수가 뒤죽박죽이 된 게 옥의 티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절판된 지 오래된 책이니 감수하고 읽어야지. 이 책은 두 번 산 책이기도 하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감상적 킬러의 고백>을 읽었다. 이번 건 좀 더 쎈 누아르 소설이다. 이십대 프랑스 아가씨를 사랑하는 어느 감상적 킬러에 대한 썰이다. 이 킬러는 동그라미 여섯 개가 박힌 고액 수표를 세금도 없이(이 부분이 킬포다!!!) 수령하며 중개인이 주문하는 표적을 처리하는 일로 먹고 산다. 문제의 발단은 멕시코로 여행을 떠난 프랑스 아가씨가 바람이 났다는 점, 그리고 최근에 의뢰받은 NGO 출신 표적을 제거하라는 주문에 무언가 마음이 심란해졌다는 점이다.
컴퓨터 같이 정확하고, 화제가 될 만한 작품을 만들어 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처리해야 하는 프로 킬러에게 애인이 웬 말이며, 왜 표적을 죽여야 하는지 호기심을 갖는단 말인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소설은 흥미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마드리드와 이스탄불, 파리 그리고 멕시코를 넘나들며 의뢰받은 사건도 처리하고, 자신의 연애사도 마무리해야 하는 킬러의 삶은 고단하다. 게다가 이스탄불에서는 심지어 표적의 도움으로 살아나기도 하지 않았던가. 세상에 이런 일이!!!
신문(혹은 잡지)에 연재된 소설이라 그런지 전개가 빠르고, 독자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수법이 탁월하다. 탁탁 끊어치는 기법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다시 기억을 되짚어 보면 처음에 읽었을 때도 그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시중에서 구할 수 있다면 세풀베다와 처음으로 만나는 이들에게 선물해 주겠으련만, 아쉽게도 그의 다른 책들처럼 절판의 운명이지라 그러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다.
작가가 막판에 준비한 서프라이즈는 좀 진부하지만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그런 결말이었다. 설명되지 않은 부분들은 그런 대로 소화할 만했다. 그리고 깔끔한 처리. 다시 프로 본능을 되살린 킬러는 감상 따위에 연연해하지 않고 본업에 충실하게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 의뢰가 될 지도 모를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뭐 그렇게 가는 거겠지만.
세풀베다 작가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그의 작품들을 다시 읽는다는 핑계로, 또 한 편으로는 작가의 소설이 주는 재미도 만끽하고 있는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 그 정도는 이해해 주시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