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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티노 평전 - 르네상스기 한 괴짜 논객의 삶 ㅣ 역사도서관 교양 12
곽차섭 지음 / 길(도서출판) / 2013년 7월
평점 :

7일 동안의 7표지 챌린지로 읽기 시작한 토스카나 아레초 출신의 16세기 베스트셀러 작가 피에르토 아레티노의 평전을 읽었다. 그런데 왜 내가 이 책을 샀는지 모르겠다. 마침 서가에서 읽지 않은 책이 눈에 띄었고, 바로 잡아서 챌린지를 시작했고 책도 마저 읽었으니 일거양득이 아닌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던 해인 1492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아레초에서 태어난 피에트로 아레티노는 태생부터 르네상스인 다운 출생의 비밀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는 평민 출신 구두장이의 아들일 수도 그리고 유력 가문의 서자일 수도 있다고 한다. 하긴 500년 전의 인물에 대한 전기다 보니 정확성보다는 추정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점이 역사 평전의 재미를 더하는 게 아닌가. 저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명확한 기록이 없다는 게 두통을 유발할 수도 있지만, 또 그만큼 자신의 주관적 아이디어를 집어넣을 수 있는 빈 공간이 생긴다는 것이니 운신의 폭을 넓힐 수도 있지 않나 싶다.
미래의 속어를 구사하는 통속작가로 필명을 날리게 되는 아레티노는 평민 출신답게 당대 식자들의 언어인 라틴어나 그리스어를 배우지 못했다. 아마 아레티노 같은 필력을 가진 이가 그런 고급 언어까지 익혔다면 아마 단테에 버금가는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지 않았을까. 사실 나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아레티노가 도대체 무얼 하는 작자인지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우연한 독서는 이렇게 새로운 지식의 길로 독자를 인도하는 법이다. 그런 게 바로 책읽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뛰어난 현실감각을 지닌 아레티노는 페루자를 거쳐 로마로 향하면서, 태양을 쫓는 해바라기처럼 권력 지향적이고 무엇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가를 본능적으로 깨달은 르네상스 전성기를 살아낸 인물이었다. 아마도 유력자의 후원을 받아 페루자에서 시집을 발표한 아레티노는 독자적 경험과 독서를 바탕으로 풍속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레티노가 빛을 보기 시작하는 장면은 아고스티노 키지의 가신으로 활약하기 시작하면서다. 뛰어난 문재와 누구와도 지낼 수 있는 천성적 친화력을 바탕으로 아레티노는 인맥을 쌓고, 그 인맥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군주를 벌하는 채찍”으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이 흥미롭게 진행된다.
아레티노가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16세기 초반은 중세 교회의 속박으로 해방된 인문주의 정신이 뜨겁게 타오르던 시기다. 아레티노 자신은 가톨릭 신앙의 기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갈고 닦은 문재를 바탕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군주들(카를 5세, 프랑수아 1세 그리고 헨리 8세)을 비롯해서 율리우스 2세나 클레멘스 7세 같은 교황들에 이르기까지 신랄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문제 뿐 아니라 이재에 밝았던 모두까기 신공의 대가 아레티노는 이미 당대 문인들이 추앙해 마지않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권력자들을 협박해서 후원금을 뜯어내는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정보력을 동원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단점을 가지고 정계와 교계 지도자들을 들었다 놨다하는 필력을 자랑한 게 바로 아레티노였다. 아레티노의 성공 뒷면에는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활자인쇄술의 발전과 루터가 독일에서 시작한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평전의 앞에 소개되는 <체위>나 <음란한 소네트>로 근대판 포르노그래피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로마에서 교황과 그들의 측근들과의 불화(심지어 암살위협)로 베네치아로 망명한 뒤에는 <예수의 수난> 같은 그야말로 신심 넘치는 작품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동서양의 무역을 독점하면서 상업으로 부흥한 자유도시 베네치아는 르네상스의 자유인 아레티노에게 그야말로 딱 맞는 공간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서민 출신 아레티노는 자신의 저술활동으로 막대한 돈을 긁어모아, 관대하게도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평민들을 도왔다. 평전의 어디선가 등장하는 자신의 집이 여관인 줄 알았더니만 병원이더라는 말은 압권이었다. 그의 고용인이었던 키지 같은 거부들은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는데 급급했지 피고용인인 아레티노처럼 베푸는 데 인색하지 않았던가. 왜 귀족들은 아레티노의 그런 관대함을 미덕이라고 칭송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부리는 하인들에게 너무 관대해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린 티치아노 같은 이들이 눈살을 찌푸렸다고 했던가. 군주들을 기묘하게 이용해 먹으면서도, 절대로 그들의 가신이나 정신 같은 종노릇은 하지 않겠다는 아레티노의 기백이 돋보였다.
곽차섭 교수의 아레티노 평전에서 가장 백미는 바로 르네상스 예술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미켈란젤로의 걸작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술비평가로서 아레티노와 벌인 설전이다. 1541년 공개된 시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에서 인벤티오네와 테코룸의 격돌을 마주한다. 이전까지 모든 학문과 예술은 기독교의 시녀 같은 존재였다. 르네상스 인문주의 정신의 도래로 아름다움에 대한 강조가 전면에 나서게 되었지만, 여전히 종교적 적절성과 신심의 고양이라는 종교가 보는 입장에서의 예술의 위치는 고정불변이었다.
그런 마당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그린 수많은 나신들이 등장하고, 수염 없는 젊은 예수가 등장하는 <최후의 심판>은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 비난의 최전선에 선 이들 중의 하나가 당대 최고의 논객이자 예술비평가로 자처한 피에트로 아레티노였다. 어쩌면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최고 걸작에서 시대정신을 앞서는 ‘인벤티오네’를 구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톨릭의 부패와 위선을 공격하던 루터를 필두로 한 개신교의 종교개혁을 방어하며 점차 보수적으로 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아레티노는 그 누구보다도 앞서 캐치해낸 것일 지도 모르겠다. 흥미로운 지점 중의 하나는 아레티노 역시 <체위>나 <음란한 소네트>처럼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주제를 다루면서도 자신은 정당한 언어로 구사했기에 괜찮다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발부하는 장면이었다.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결국 1563년 트렌토 공의회의 결정으로 <최후의 심판>에 덧칠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아레티노의 삶은 그야말로 질풍노도 같은 시대를 그린 한 편의 초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치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고, 영원한 도시 로마는 프랑스와 독일의 이탈리아 전쟁의 와중에서 독일 개신교 용병들에게 훗날 “로마 약탈”이라는 알려진 비극적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르네상스 자유인 아레티노는 군주들과 교황의 비호 아래, 무시로 진영을 바꿔가며 주제를 가리지 않는 비판으로 권력자들에게 날카로운 채찍을 휘둘러댔다. 매문(賣文)이라는 기술로 돈을 번 선구자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상은 혼돈의 시대를 냉철한 현실주의 감각으로 돌파해낸 문제적 인물 피에트로 아레티노 평전에 대한 감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