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초 아가씨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앤 타일러 지음, 공경희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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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이상이었다. 먼저 샤일록 다시 쓰기를 읽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하워드 제이컵슨과 나는 맞지 않는 것 같다. 그의 다른 책도 아마 읽기 시작은 했는데 좀 읽다 말았던 것 같다. 같이 산 책인 앤 타일러의 <식초 아가씨>는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현대 미국 볼티모어에 사는 닥터 버티스타 가족을 주인공으로 삼았는데 흥미진진하고 재밌다. 이런 책이라면 대환영이다. 다만 내가 원작을 읽지 않았다는 데 흠이라면 흠일까나.

 

개인적으로 앤 타일러의 작품은 <파란 실타래> 밖에 읽어 보지 못해서 그녀의 스타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식초 아가씨>에 등장하는 네 명의 주인공들에 대한 캐릭터 설정은 탁월했다. 우선 29세의 여주 케이트를 보자. 어머니를 여의고 괴짜 박사인 아버지 루이스 버티스타를 지난 수년 동안 보필해 오지 않았던가. 원작에서는 파도바의 말괄량이 아가씨 카타리나가 현대 미국의 볼티모어에서는 자립성 강하고 자주적인 여성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녀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게 바로 여동생 버니다. 그녀는 아름답고 여성적인 매력을 물씬 풍기는 십대 소녀다. 스페인 어 가정교사로 채용된 건달 같은 이웃집 청년 에드워드 민츠와 썸을 타는데, 이것이 뒤에 화근이 된다.

 

다음 주자는 그녀들의 아버지로 자가면역질환에 삶을 올인한 루이스 버티스트 박사가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그야말로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자신의 조교로 러시아에서 온 고아 청년 표트르(피요더) 체르바코프의 미국 체류를 위해 자신의 딸인 케이트와의 결혼을 추진하면서 갖가지 문제들이 발생한다. 앤 타일러의 기량이 빛나는 순간이다. 버티스타 패밀리는 그러니까 이민국 관리들의 깐깐한 조사를 속이기 위해, 이런 말도 안되는 프로젝트를 구상한 것이다. 식물학을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중단한 케이트 역시 “인신매매”라며 격렬하게 반항하지만, 결국 노련한 버티스타 박사에게 설득되어 표트르와 결혼에 동의한다.

 

사랑을 전제로 한 진짜 결혼이 아니다 보니 매리지 프로젝트는 초반부터 삐걱댄다. 닥터 버티스타는 케이트와 표트르와의 우연한 만남을 주선하고, 두 남녀 사이에 무언가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전형적인 괴짜 연구자의 발상이 아닌가, 발칙하기 짝이 없다. 어린이집에서 보조 교사로 일하는 케이트는 애인도 없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없다. 그저 자신에 삶에 충실할 따름인데 이런 고난이 닥치다니. 어디 인생이 그렇게 만만하던가.

 

시작부터 잘못된 만남이 순탄하게 이어질 리가 있나.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비건을 자처하는 버니의 유사 남친 에디가 닥터 버티스타의 연구실에서 표트르가 애지중지하며 공들인 일단의 생쥐들을 하필이면 결혼식 당일날 탈취하면서 결혼식은 엉망진창으로 흘러간다. 그렇지 이 정도는 돼야 셰익스피어 원작의 아우라를 품고 있는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겠지. 얼토당토않은 결혼을 계획한 닥터 버티스타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얼마나 냉소적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아주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 앤 타일러의 셰익스피어 쓰기에 호감이 갔다. 고전의 내러티브를 현재에 안착시키는 작업이 쉽지 않았을 텐데 앤 타일러는 국제결혼, 목적지향적인 괴짜 연구자, 진실한 사랑 그리고 ‘그린 카드’ 획득 같은 어떻게 보면 클리셰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현실을 빼닮은 스토리들을 훌륭하게 재창조해내는데 성공했다. 개인적으로는 결혼식날, 팔려 가는 언니 케이트에게 당돌하게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전달한 버니의 직언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아무리 어린 동생이라고 하더라도, 제 할 말은 다하고 또 상당 부분은 맞는 말이었으니까. 쉴새없이 돌아가는 결혼이라는 과정과 아버지에 대한 희생 가운데 자아를 상실한 케이트의 갈등이야말로 앤 타일러가 다시 쓴 <식초 아가씨>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마지막 장의 셀마 이모가 준비한 결혼 피로연에서 모든 사실이 드러난 다음, 케이트가 하는 선언이야말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진실된 외침이 아닐까. 서로 다른 생활방식과 사고를 지닌 이들이 조화를 이루어 가는. 그런 세상이야말로 살 맛 나지 않을까.

 

역자가 말한 대로 ‘앤 타일러의 마법’에 빠져 보시라. 기대 이상으로 재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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