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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디자인 1 ㅣ 지식을 만화로 만나다 1
김재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평점 :
오래 전에 김재훈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리는 그림을 좋아해서, 아마 네이버에서인가 친구 신청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는 받아 주지 않았다. 그 트라우마로 나는 지금까지도 온라인상에서 익명의 누군가에게 먼저 친구 신청을 하지 않는다. 그냥 그랬다고. 그리고 오늘 그가 그리고 쓴 <더 디자인> 첫 번째 이야기를 읽게 되었을 때 바로 그 생각이 떠올랐다.
본문도 좋았지만 말미에 그가 쓴 프랑스혁명 이래,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한 법복귀족 혹은 부르주아 계급의 디자인 소비 습성에 대한 분석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대검귀족들이 그렇게 까다롭게 만들어 놓은 궁정 예절은 특권의식의 발로이자, 회원제 클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귀족사회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입장권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혈통귀족의 자리를 대신한 자본귀족이 자본으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아방가르드 스타일의 전위적 디자인에 대해서도 저자는 상식과 보편을 엄수하라고 정중하게 요청한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어쩌면 상식과 보편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그 무엇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디자인 혹은 브랜드는 엄밀하게 말해서 커스터머의 주문에 의한 주문제 생산양식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물론 스티브 잡스 같은 괴짜 천재는 실용성을 포기해 가면서까지 자신만의 고유한 디자인을 고집해서 결국 대중을 설득하는 마성으로 시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런 성공담이 모든 케이스에 적용되는 건 아니니 염두에 두도록.
덜어낼수록 풍부해진다는 뜻의 “Less is more”라는 명언을 남긴 루트비히 비스 반 데어 로에의 아이디어도 마음에 든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 기능주의야말로 디자이너들을 압박하는 하나의 구호가 아니었을까. 그 어느 때보다도 기술 복제가 용이해지고, 대중이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를 겸하게 된 시대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는 일은 쉽지가 않게 되었다. 아니 스티브 잡스가 아이팟을 만들 때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낸 것일까? 절대 아니다. 그는 현존하는 요소들을 이용해서 기기를 만들었을 뿐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구나 싶다.
한 때 자유와 해방 그리고 섹시의 상징이었던 청바지가 어느새 주류 사회에 편입되어 하나의 패션으로 인정받게 된 점도 아이러니하다. 리바이스 청바지만 해도 감지덕지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디자이너 청바지 가격이 10만원을 훌쩍 뛰어 넘게 된 점을 단순하게 산업적 관점으로만 볼 수 없다는 지적에도 공감이 간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데님이라는 말도 프랑스 님 지방의 원단에서 왔다고 했던가. 청바지에 리벳을 박아 넣자는 아이디어도 당시로서는 참으로 신박한 아이템이 아니었을까. 아이팟의 경우처럼, 아무리 터무니없어 보이는 아이디어라도 상품화하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스티브 잡스 같은 혁신적 사업가에게나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의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되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모르는 정보에 대한 습득이다. 추파 춥스 포장지의 디자인을 현대 미술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가 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현대 산업 디자인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자동차 디자인의 세계는 또 어떤가. 자동차 산업은 아무래도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브랜드와 기능성이 더 우선이 아닐까.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를 기용해서 디자인을 뽑아도, 정작 자동차 브랜드가 세계 시장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는 점은 디자인이 갖는 힘의 한계에 대한 방증인가 아니면 자동차 제조 기술이 일류 회사들의 그것보다 못하다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자동차 애호가들이라면 누구나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포르쉐의 개발자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군수지원 차량을 제작하면서 부역했다는 점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알게 됐다. 며칠 전 다이소에서 전범기업으로 알려진 모리나가 제과에서 만든 밀크카라멜을 집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는데, 삶 가운데 앎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나의 작은 소신을 지킨 것 같아 조금은 뿌듯해졌다.

1편도 흥미로웠는데 <더 디자인> 2편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 지 궁금하다. 아, 마지막으로 제주도에 세계적 건축가인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지니어스 로사이>라는 미로가 있다고 하는데 언젠가 다시 제주도에 가게 되면 한 번 찾아가 보고 싶다. 진짜 가보고 싶은 곳은 오사카의 <빛의 교회>라는 곳이지만 당장 갈 수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