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모사의 눈부심 - 문학세상 외국소설선 1
쥴퓨 리반엘리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세상 / 2002년 2월
평점 :
절판


 

 

 

작년 달궁 독서 모임에서 아민 말루프의 <동방의 항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됐다. 이미 절판되어 살 수도, 그렇다고 도서관에서도 빌릴 수가 없는 책이었다. 오늘 중고서점에서 사서 단숨에 읽어 버렸다. 17세기 폐위된 광인 술탄 이브라힘에 대한 이야기를 쥴퓨 리반엘리라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터키 작가가 소설로 발표했다. 나에게는 생소한 작가지만 책을 읽으면서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서사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천년제국 동로마제국의 보석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메흐메트 2세 이전부터 터키 궁정에서는 왕위 계승자가 술탄의 자리에 오르면 형제들을 모두 죽이는 풍습이 있었다. 어쩌면 권력투쟁을 위한 골육상쟁의 씨앗을 아예 차단하려는 계획이 아니었을까. 소설의 주인공 아비시니아 출신 흑인 환관장 슐레이만은 어려서 노예 상인에게 납치되어 거세된 뒤, 노예시장을 거쳐 술탄의 궁정에 들어오게 되었다.

 

세계의 1/4을 지배한다는 신의 대리인 아니 거의 신에 가까운 권력을 행사하는 술탄의 최측근으로 슐레이만은 3명이나 되는 술탄을 모셔 왔다. 아무리 최절정의 권력자라고 하더라도 술탄의 명으로 목이 날아가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가 모시는 현 술탄의 형이 오스만 제국의 최고 권력자였던 시절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아무런 이유 없이 술탄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염이 허연 제국의 대신들이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졌으니 말이다.

 

소설에서 다루는 핵심 사건은 바로 술탄의 폐위였다. 아니 도대체 누가 쿠데타를 일으켜 신에 버금가는 권력을 지닌 술탄과 애첩 귤베덴(장미 몸매를 의미한다)을 함께 궁정의 벽에 가두었단 말인가. 천국으로 가기 위해 결여된 신체의 소유자 슐레이만은 타인의 신체 한 부분을 병에 넣어 가지고 다닌다. 제국을 흔든 대지진과 함께 그 병이 깨진 징조는 불길하게 다가온다. 술탄에 대한 그의 충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지만, 우선 쿠데타의 주범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이 순서다.

 

리반엘리 작가는 연대기적 시간의 흐름에 따른 구성 대신 과거와 현재를 무시로 오가는 구성을 선보인다. 슐레이만이 모시는 술탄 역시 형이 즉위하던 시절, 살해당할 뻔한 위기를 넘겼다. 그것이 트라우마로 작용하면서 슐레이만이 모시는 술탄이 느끼는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 형이 죽고 나서 그가 술탄이 되었을 때,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바로 복수였다. 다음에는 누구를 죽일까라는.

 

“부족한” 67세의 인간 슐레이만은 권력의 속성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세르비아인 총리대신 바요 소콜로비치가 술탄이 폐위된 뒤, 처참하게 죽은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도대체 누가 술탄을 폐위시켰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술탄의 모후인 베네치아 출신 황태후였다. 권력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권력의 속성을 다시 한 번 저자는 터키 궁정에서 벌어지는 정쟁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낸다. 황태후는 자신의 아들을 폐위시키고 대신 7살 난 손자를 대율법사의 승인 아래 왕위계승식을 진행했다. 그리고 새로운 술탄은 할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술탄의 할머니는 다시 한 번 출혈과다로 소년을 죽이려는 음모를 진행했다가 발각된다. 도대체 인간의 권력욕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신의 뜻”이라는 미명 아래 지난 8년간 제국을 다스려온 술탄을 권좌에서 끌어 내리고, 이번에는 새로 등극한 소년 술탄마저 저승길에 보내려는 시도라니.

 

매력적인 사피예를 자신의 노예이자 스파이로 만들어 궁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염탐하는 데 동원한 슐례이만의 능력도 대단하다. 결국 자신을 지하 감옥에서 구출하는데 일등공신도 역시나 사피예였다.

 

슐레이만은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인 메브라나교의 수도승 포스트니신 선생에게 세속적 물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충고를 듣는다. 하지만 오스만 궁정에서 사는 환관장에게 그게 가당키나 한 주문이었을까. 슐례이만은 그 누구보다도 더 황실에서 부는 바람이 어디로 향하는지 잘 아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대사도 반했다는 술탄의 하렘에 기거하는 미녀들에 대한 이야기며, 술탄을 매혹시킨 아르메니아 출신 애첩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살모사의 눈부심>에는 넘쳐흐른다. 한 마디로 말해 독자를 혹하게 만드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프랑스 니스 출신 귤베덴/베로니카를 그야말로 살아있는 천사와 성녀 혹은 천상의 꽃으로 묘사하는 슐레이만의 심정은 또 어떤가. 어쩌면 그가 결정적으로 술탄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든 이유가 바로 귤베덴의 존재가 아니었을까. 가질 수가 없기에 더 애타게 갈구하는 심정이라고 해야 할까. 견딜 수 없는 두통을 이기기 위해 쥐옷을 만들며 소일하던 귤베덴을 사랑한 환관장의 이어지는 고백은 참으로 슬픈 비가였다.

 

스포일은 여기까지만 하자. 과연 폐위된 술탄에게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책을 읽어 보시라. 짧은 호흡으로 딱딱 끊어지는 간결한 문장이 일품이다. 군더더기가 없는 구성의 중심에는 미스터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양념으로는 술탄이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도 적재적소에 잘 준비되어 있다. 터키 궁정의 하렘이라는 에로틱한 요소도 한 몫 단단히 한다. 이 모든 요소들이 마술사 리반엘리의 손에서 조화의 과정을 거쳐 <살모사의 눈부심>이라는 걸작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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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2-26 1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저 어제 동네 중고서점에서 이 책 득템했어요!!!!!
절판에 도서관에도 없어 속상했었는데 2900원에 데꼬왔어요. ㅎㅎ
저도 곧 읽을거에요. ^^

레삭매냐 2019-02-26 20:22   좋아요 1 | URL
이제 책도 수중에 넣으셨으니...
힘껏 달려 주세요 :>

커피 한 잔 값도 안되는군요.

왜 좋은 책들은 그리도 빨리 절판
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빨강앙마 2019-02-27 0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이 그리 유명한가요? 개인적으론 첨 들어보는 작가고 제목인지라.. 설해목님도 막 중고로 들이셨다고 하니 더 궁금해지네요^^

레삭매냐 2019-02-27 10:24   좋아요 0 | URL
아민 말루프-쥴퓨 리반엘리 그리고
오르한 파묵까지 요즘 터키 작가들
의 책을 달리는 중이랍니다.

리반엘리 책이 국내에 소개된 다른
책이 없어 아쉬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