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아의 우편배달부
구드룬 파우제방 지음, 오공훈 옮김 / 교유서가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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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소설이다. 아니 왜 이달에는 이렇게 좋은 책들을 연달아 만나게 되는 거지? 인생책이라 부를 만한 시배스천 폭스의 <바보의 알파벳>을 필두로 해서, 내 책의 명전(명예의 전당)에 알라 알아스와니의 <시카고>, 쥴퓨 리반엘리의 <살모사의 눈부심> 그리고 구드룬 파우제방의 <보헤미아의 우편배달부>도 당당하게 이름을 올릴 법하다.

 

아마 이 책은 내가 지난 토요일날 달궁 모임을 마치고 종로책방에 들리지 않았다면 평생 만날 일이 없는 그런 책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항상 책에 대한 레이더의 촉을 예리하게 돌리고 있지만 모든 책이 다 나의 레이더망에 걸리는 것은 아니잖은가 말이다.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 때도 그랬던 것처럼 나만 아는 작가를 만나는 즐거움은 오래전 아무도 건즈 앤 로지즈의 존재를 모를 때, AFKN에서 케이시 케이슴 아저씨가 들려준 <Sweet Child O'Mine>을 듣고 뻑이 갔을 때의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잡설이 언제나처럼 길었다. 소설 <보헤미아의 우편배달부>의 주인공은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왼손을 잃고 고향 볼펜탄(‘늑대가 사는 전나무 숲’이라는 뜻이다)의 브뤼넬로 돌아와 우편배달 업무에 종사 중인 요한 포르트너다. 시간은 1944년 8월. 두 달 전 동부전선에서 소련의 바그라티온 작전이 시작되면서 제국 베흐마흐트는 침략전에서 방어전으로 수세에 몰리게 된다. 이미 전쟁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파우제방 작가는 하인리히 뵐이나 볼프강 보르헤르트처럼 전장의 비참한 현실을 전달하지 않는다. 대신 동보헤미아의 산골 마을에서 전쟁과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곳을 공간적 무대로 삼아 강력한 반전 메시지 제조에 착수한다.

 

전쟁터에 나갈 수 있는 모든 젊은이들은 징병되어 전선으로 향했다. 나치는 심지어 국민돌격대라는 이름으로 소년병과 전투에 참가할 수 없는 노인들마저 끌어 모아 그야말로 유령 같은 부대를 만들고 있었다. 한편, 우리의 요한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검은 편지’를 배달해야 하는 숙명을 져야만 했다. 책을 읽다가 문득 차라리 전장에 나가서 죽음을 맞는 게,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전달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라는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과연 어느 것이 나을까. 고지식한 독일인답게 요한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리고 눈발이 엉덩이까지 쌓여도 자신의 업무인 편지 배달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특히나 그 편지가 검은색이라면 더더욱. 개인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격하게 공감하는 소년 요한의 모습이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의 하나였다고 말하고 싶다.

 

나치의 마수는 볼펜탄 산골 마을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치매에 걸려 이미 전쟁에서 죽은 자신의 손자 나치 광신자 오토를 기다리는 노부인 키제베터는 너무 불쌍하다. 독일의 전중 생산력은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증대되었는데, 히틀러의 군수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터의 뛰어난 능력도 있었겠지만 소설에도 나오는 것처럼 전쟁 포로로 유럽 각지에서 독일로 끌려온 노동자들의 노예노동도 한몫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볼펜탄에는 그들 뿐 아니라 루르 지방 같은 공업지대에서 산골마을로 피난 온 이들도 오직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삼은 사람들도 넘쳐났다.

 

한편, 요한의 어머니이자 산파였던 요제파는 외아들이 훈련을 받던 중 사고로 동사한다. 어머니가 이번 전쟁에 나갈 아이들에게 세상의 빛을 보게 도움을 주었다면, 요한의 애인이 되는 린츠 출신의 이르멜라 파이트는 이제 전쟁이라는 비극을 마주하지 않아도 될 아이들의 탄생을 돕는 역할로 등장한다. 파우제방 작가는 이렇게 전간기에 태어나 전쟁에 동원될 수 밖에 없었던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라인강의 기적’을 창조해내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소진해야 했던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요한이라는 대표선수를 주인공으로 삼아 종횡무진하게 진행한다.

 

전쟁의 참화가 그대로 드러나는 동부전선의 전장과 달리 볼펜탄의 아름다운 일곱 산골 마을의 모습은 평화 그 자체다. 발칙한 천재 꼬마 헬무트라는 녀석은 독일의 패망과 총통의 자살 그리고 요한의 짧은 운명까지도 연달아 예언한다. 실제로 유대인 의사 가족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리고, 지도자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의해 ‘증발’해 버리는 경우가 있지 않았던가. 오토나 마리엘라 같이 총통에 대한 맹신으로 똘똘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있는가 하면, 우편배달부 요한에게 따뜻한 음식과 커피를 대접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쩌면 파우제방 작가는 그 두 진영이 다른 이들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예전에 세뇌당한 채 자란 총통과 조국을 위해 독일 제국의 철부지 소년들이 무시무시한 러시아 전차를 요격하겠다고 판쩌 파우스트로 무장한 사진을 보면서 어찌나 가슴이 애잔했는지 모르겠다.

 

전쟁을 경험해 보지도 않은 이들이 전쟁 운운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혀를 차게 된다. 우회적인 방식으로 강력한 반전 메시지를 전달하는 파우제방 작가의 놀라운 실력에 다시 한 번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사는 한반도에도 종전선언에 이은 영원한 평화의 향기를 깃들길 바란다.


[뱀다리] 소설에서 나치 국가사회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이 독일 패망 직전에도 전세를 단박에 뒤집을 수 있다는 “기적의 무기” 타령을 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할 말을 잃었다. 18세기 <7년 전쟁>에서 수세에 몰렸던 프리드히리 2세의 기적적인 승리를 꿈꾸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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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5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9-02-25 16:12   좋아요 0 | URL
아주 격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

인문학자 선배님이신 에라스무스
도 그런 광신을 아주 배격했죠.

목나무 2019-02-25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퇴근하자마자 바로 이 책 집어들게 생겼어요. ㅎㅎ
저는 레삭매냐님 덕분에 정말 새로운 작가와 작품들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올 한해도 숨어 있는 보석같은 작품과 작가들 많이 알려주셔요. ^^

레삭매냐 2019-02-25 16:14   좋아요 1 | URL
고고씽~ 입니다. 너무 흥미진진해서
다 읽지 않고서는 배길 재간이 없더라는 -

아 자리를 빌어
이제 곧 쓸 <살모사의 눈부심>도 강력
추천하는 바입니다.

목나무 2019-02-25 16:39   좋아요 1 | URL
<살모사의 눈부심> 절판이에요. T.T
하지만 꼭 구하고 말거에요!
리뷰 기다리겠습니다. ^^

coolcat329 2019-02-26 2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책표지가 참 이쁘네요. 게다가 놀라운 소설이라니...또 리스트에 올립니다. 레삭님 덕분에 저 역시 새로운 작가,작품 알게 되어 기쁘네요.

레삭매냐 2019-02-27 09:02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의 존재를 몰랐다가 중고서점을
통해 알게 돼서 너무 즐거웠답니다.

모쪼록 즐거운 독서의 시간이 되시길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