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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메
오스카 와일드 지음, 오브리 비어즐리 그림, 권오숙 옮김 / 기린원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요즘 나의 책에 대한 정보수집의 주된 루트는 인스타그램이다. 예전에는 싸이월드나 페북이 인기였다면 이제 대세는 인스타다. 거의 모든 정보의 총집합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그리고 책쟁이들도 다수 인스타에서 활동 중이다. 넘쳐 하는 정보의 바다 항해는 언제나 그렇듯 정겹다. 책을 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또 어제 두 권을 샀다. 하나는 인스타를 통해 알게 된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 그리고 다른 하나는 테리 이글턴의 책이었다. 후자의 경우는 읽지도 않으면서 꾸역꾸역 사대고 있구나.
<살로메>는 오스카 와일드가 1891년에 프랑스 어로 쓴 희곡이다. 어, 오스카 와일드는 아일랜드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데 프랑스 어로 희곡을 쓸 정도였단 말인가. 놀랄 노짜로다. 기린원에서 11년 전에 나온 책은 지금 절판이다. 나같은 절판 사냥꾼의 아주 좋은 사냥감이 아닐 수 없다. 어제 달려가서 냉큼 사왔다. 성서에 등장하는 헤로데와 살로메 그리고 세례 요한의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일본 회화 스타일인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아 제작했다는 오브리 비어즐리의 그림 또한 희곡 <살로메>를 도 다채롭게 만드는 요소 중의 하나다. 간결한 선으로 비극을 재구성한 스타일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사람의 아들’(the son of god)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 지상에 와서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한 세례 요한은 헤로데의 궁전에 투옥되어 있는 상태다. 갑자기 생각난 건, 로마에서 파견한 유대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엄연하게 존재하는데 헤로데 왕의 존재는 또 무언가. 유대는 당시 로마의 식민지/속주가 아니었던가? 어쨌든 헤로데는 세례 요한의 예언을 믿는 것으로 보인다.
왕궁에서 헤로데는 바리새 인과 사두개 인 그리고 다수의 유대인들이 등장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갈릴리와 사마리아 각처에서 이적을 행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는다. 다른 이적들은 모르겠으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만은 못하게 하라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기독교 구속사에서 영생과 구원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부활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교리가 아니던가. 지난주 설교에서 목사님이 ‘메멘토 모리’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어쩌면 헤로데 역시 자신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뭐 이 정도가 당시 시대상에 대한 간략한 소개라면 곧 이어 등장할 팜므 파탈 살로메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살로메는 관능적인 아름다움으로 병사들까지 현혹시킬 정도의 아름다움을 가진 유대 공주다. 그녀의 어머니 헤로디아는 원래 헤로데의 부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헤로데의 형수였다. 그래서 옥에 갇힌 세례 요한은 헤로디아와 자신을 유혹하려는 살로메를 바빌론(70년간의 유수생활로 유대인들에게 바빌론은 타락의 상징으로 보인다)의 창녀라는 폭언을 마다하지 않는다.
헤로데의 자신의 의붓딸에 대한 관음적 태도는 뭇 사내들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 이미 눈치를 챈 헤로디아는 살로메를 그만 쳐다보라는 핀잔을 준다. 헤로데는 살로메에게 자신을 위해 춤을 춘다면 왕국의 절반 아니 무슨 소원이라도 들어준다고 제안한다. 살로메는 이 제안을 덥썩 받아들이고, 왕이 흡족할 만한 춤으로 보답한다. 그리고 그녀의 소원은 바로 세례 요한의 목이었다. 좀 엽기적이지 않은가?
그나마 좀 의식이 있었던 헤로데 왕은 그것은 들어줄 수 없다며, 카이사르로 갖지 못한 큰 사이즈의 에메랄드, 50마리의 공작새, 진주, 사파이어 등등 각종 보석으로 살로메의 요구를 철회하려고 하지만 공주는 요지부동이다. 헤로디아까지 나서서 자신을 모욕한 광야의 예언자의 죽음을 요청한다. 어쩔 수 없이 헤로데는 공주의 소망을 들어주고, 세례 요한의 목은 은쟁반에 담겨 공주에게 전달된다. 죽은 세례 요한에게 죽음의 키스를 하는 장면 정말 이 희곡의 절정이 아닐 수 없다. 삽화를 맡은 비어즐리를 두 장을 이 장면에 할애한다.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죽여서라도 소유하겠다는 걸까. 네크로필리아적인 성향마저 보인다.
결국 헤로데는 살로메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병사들이 그녀를 잡아가는 것으로 희곡은 끝난다.
원조 팜므 파탈로서 살로메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유대 공주라는 고귀한 신분의 여성이 한낱 광야의 선지자에 지나지 않는 세례 요한을 사랑한다는 설정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에게 관음적 시선을 보내는 의붓아버지 왕의 앞에서 요사스러운 한 춤을 추질 않나, 그 대가로 여느 공주처럼 자신의 품격을 높여줄 보석을 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사랑한다고 고백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하니 말이다. 이 한 컷만으로도 살로메 에피소드는 숱한 회화와 문학의 타깃이 되어왔다.
그런데 오스카 와일드가 이 작품을 발표하던 빅토리아 시대는 세계를 제패한 영국 사교계의 교조적이고 정숙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브람 스토커의 고딕 소설 <드라큘라> 같은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트란실바니아 출신 드라큘라 백작이 영국의 숙녀들을 유혹해서 날카로운 이빨을 그녀들의 목덜미에 박아 넣는 장면도 살로메의 불특정 다수에 대한 관능적 유혹과 다르지 않다. 정숙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뒤틀린 성적 욕망에 대한 리포트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에피쿠로스의 출중한 후예라고 할 수 있는 오스카 와일드 역시 한 숟가락 얹은 것 같다.
짧지만 강렬한 역사상 최고의 팜므 파탈에 대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