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보트 비밀일기 ㅣ KODEF 안보총서 88
제프리 브룩스 지음, 문근식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17년 1월
평점 :
제2차세계대전사에 관심이 많아서, 오래전에 타임라이프에서 출간된 <World War II>를 사 모은 적도 있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관심사 부분이라, 2차세계대전 당시 대서양에서 독일 잠수함 부대원이자 통신장으로 실전에 참가했던 볼프강 히르쉬펠트의 기록은 유혹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독일 해군에서 사적 기록을 엄금했다고 하는데, 전쟁 중에 히르쉬펠트의 기록이 발견되었다면 군법회의에 회부에서 처형될 수도 있을 만한 그런 사안이었다고 한다. 후대에 우리는 히르쉬펠트 덕분에 대서양 바다에서 벌어진 치열했던 잠수함전에 대해 알 수가 있게 되었더니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책의 번역과 감수는 대한민국 잠수함 함장과 전대장을 지낸 문근식 대령이 맡아 주셨는데, 아무래도 잠수함과 관련된 전문 용어들이 다수 등장하다 보니 전문가의 조언이 독서에 되었다.
1916년 베를린 출신의 볼프랑 히르쉬펠트는 간전기에 전문 어부가 되고자 실업학교를 통해 교육을 받았다. 히틀러가 부상한 뒤, 준군사 조직인 나치돌격대에 참여하기도 했다. 국립수산학교에서 5년간의 교육을 받고, 전문어부 자격증을 받으려던 히르쉬펠트의 꿈은 나치가 권력을 잡고, 12년의 군 경력을 가진 이들에게만 모든 일자리를 배부하면서 깨어졌다. 결국 히르쉬펠트는 1935년 군에 입대하게 되고, 1940년 유보트 승조원으로 대서양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미국이 참전하기 전인 1940년만 하더라도 독일의 전쟁기계는 세계를 석권할 것 같은 기세였다. 폴란드와 프랑스 그리고 베네룩스 3국에서의 놀라운 전과에 힘입어 유럽 대륙에서 홀로 남은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칼 되니츠 잠수함 사령관의 지휘 아래 귄터 프린과 오토 크레이머 같은 유보트 에이스들의 활약이 시작되었다. 영국으로 향하는 모든 상선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 개시됐다. 이미 1차세계대전 당시에도 독일제국의 유보트 전단은 연합군의 생명줄인 상선대를 공격하며 악명을 떨치지 않았던가.
문제는 히르쉬펠트가 탑승한 U-109를 비롯한 다수의 유보트들이 날이 갈수록 레이더와 대잠전투능력이 향상되어 가는 연합군 함대의 능력에 비해 낙후되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베버 대위 같이 무능한 기관장 때문에 전체 승조원들이 위협에 노출되기도 했다. 매일의 전과가 사령부에 보고되고, 비교되기 때문에 다른 유보트 간의 유기적인 협조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고질적인 연료와 식량 부족과 미숙한 승조원들의 실력 때문에 히르쉬펠트의 유보트는 바로 앞에 노인 적을 놓치기가 일쑤였다. 오죽했으면 ‘어뢰운반선’이라는 불렸을까. 아마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적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레이더 시스템에 독일군에게는 보급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수중에서 청음기를 이용해서 바다 위의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원시적인 방법을 동원했으니 말이다. 유보트들이 먹잇감으로 삼은 상선대로 무장을 하고 있다는 걸 미처 몰랐다. 심지어 어떤 상선은 폭뢰발사대까지 갖추고 있어서 바다 속에서 자신들을 쫓는 유보트들에게 천둥 같은 폭뢰를 선사하기도 했다. 한편, 적재하고 있던 어뢰가 다 떨어지면 부상해서 함포로 적선을 공격하는 대범함을 보여 주기도 했다.
히르쉬펠트는 통신장으로 통신을 주관했을 뿐 아니라, 임시 의사로 승조원들의 고질병인 임질 같은 성병치료에도 나서기도 했던 모양이다. 낡은 U-109로 적도를 지나 카보 베르데에서 브라질,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플로리다 해안선까지 진출했던 대서양의 늑대들의 위용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유보트들의 작전 반경일 컸는지 미처 몰랐다. 나중에는 연료를 보급하는 잠수함도 개발되어, 작전 중인 유보트들에게 식량과 귀중한 연료를 보급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작전을 마치고 귀환할 연료가 충분한 동료 유보트 함장은 U-109의 하인리히 블라이힐로트 함장에게 어뢰와 연료의 맞교환을 제시하기도 하는 유쾌한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한창 대서양 작전이 무르익던 1941년 대소전이 시작되면서 제3제국의 운명도 다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전장의 선수들은 깨닫기 시작한다. 결국 독일군의 전진이 모스크바 코앞에서 멈추고, 다음 해의 카프카즈 산맥까지 도달했던 블라우 작전도 스탈린그라드 패전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해군 지휘부는 전쟁의 승패가 유보트 해상작전에 달렸다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히르쉬펠트는 이렇게 낡은 유보트로 전쟁에 이길 수 있다는 그들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 아니 그런 주장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대서양에서의 화려한 전투를 뒤로 하고 결국 패전 직전에 준위로 진급한 히르쉬펠트는 마지막 임무로 U-234에 일본군 무관을 태우고, 산화 우라늄을 일본에 전달하라는 비밀 임무 수행에 나선다. 그동안 궁지에 몰린 히틀러라 베를린의 총통 벙커에서 자살하고, 전쟁이 끝나 버렸다. U-234는 항해 중이던 인근에 위치한 캐나다군에게 항복하는 대신, 미군에게 투항을 선택한다. 임무에 실패한 일본 군인들은 자결하고 관련된 서류들은 바다에 폐기된다. 실제 전쟁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미국 해안경비대 소속원들이 그들을 전쟁포로 취급하고 육군은 유보트 승조원들의 소지품을 약탈한다. 그나마 미해군이 신사적이었다는 히르쉬펠트의 증언이 인상적이었다.
결말 부분에서 히르쉬펠트들이 운반하던 핵물질의 존재를 알게 된 미군 당국이 막 개발된 핵폭탄을 일본에 투하해서 완강하게 저항하던 일본으로부터 조기 종전을 이끌어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등장하는데, 그 건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