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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비밀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박세형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평점 :

로베르토 볼라뇨, 내가 자신있게 최애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작가 중의 한 명이다. 오래 전에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으로 그를 알게 된 뒤로 계속해서 볼라뇨를 읽고 있는 중이다. 영화 <나우 유 씨 미>에서 우디 해럴슨이 그의 작품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는 장면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었다. 양키들도 볼라뇨를 읽는구나 하고. 아쉽게도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작년 여름에 다시 도전했지만 이번에도 완독에 실패했다. 메가 픽션 <2666>은 2편까지 읽고 3편까지 들어갔지만 결국 못 다 읽었다. 내년에는 볼라뇨 전작읽기를 선언해야 하나.
볼라뇨의 모든 책들이 출간되었다고 생각한 건 나의 착각이었다. 이번에 볼라뇨가 죽은 뒤에 그의 작업 컴퓨터에서 나온 파일들을 바탕으로 소설집 <악의 비밀>과 시집 <낭만적인 개들>이 출간됐다. 후자는 아쉽게도 내가 시를 읽지 않아서 선택을 받지 못했다. 아마 훗날 전작읽기를 시작하게 되면, 그 때나 읽게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오늘 내게 도착한 <악의 비밀>은 아무래도 유고작이다 보니 급작스러운 결말, 이게 무슨 이야기지 하는 그런 당황스러움을 느낄 수가 있었다. 무언가 이야기가 한참 시작되려다가 그만 두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하긴 볼라뇨의 스타일이 원래 그런 게 아니었던가라고 생각한다면 이해못할 것도 없을 것 같다. 미완의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
그나마 제대로 된 서사의 구색을 갖추고 있는 <대령의 아들>을 보자. 퀜틴 타란티노가 연상되는 전형적인 비급 영화 내러티브를 따른다. 대령의 아들인 레이놀즈 주니어와 좀비에게 물려 좀비가 된 그의 여자친구 줄리의 종횡무진 스토리가 펼쳐진다. 좀비로 변한 줄리는 연인에게는 식욕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좀비가 등장하는 마당에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서사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가 아닌가. 좀비 서사 자체가 황당함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줄리에게 물려 좀비가 된 건달 일당과의 대결도 비급 정신을 극대화하는데 한몫한다.
해변에서는 별의 별 일들이 벌어진다고 했던가. 저승사자를 연상시키는 노인장과 책읽기를 사랑하는 뚱뚱할 할머니가 등장하는 짤막한 이야기도 마음에 든다. 젊은이들이라면 바닷가에서 지긋하게 시간을 보낼 리가 없겠지. 무언가 새롭고 신나는 일을 찾아 떠날 테니. 하지만 어쩌면 곧 사신을 맞을 지도 모르는 노인장들에게 시간의 무화란 어떤 의미에서 동지 같은 것이 아닐까. 두꺼운 책으로 시간과 맞서 싸우는 할머니의 모습에 대한 스케치가 오랫 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기묘하게 보디빌딩을 하는 그야말로 근육질의 오빠가 야릇한 동성애 시츄에이션으로 빠져 드는 이야기는 또 어떤가. 여동생 마르타는 자신이 일하는 미용실 선배 언니와 오빠의 썸씽을 기대해 보지만, 고아가 된 남매의 운명을 그렇게 순탄하게 갈 모양이 아닌가 보다. 어느날 오빠의 친구들이 하숙생을 자처하면서 집에 들이닥치더니만 결국 사단이 나고 만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야만스러운 탐정들>에도 등장했던 볼라뇨의 문학적 분신 아르투로 벨라노의 멕시코 망명에 대한 이야기들도 분절처럼 등장한다. 다시 한 번 라틴아메리카를 하나로 만드는 언어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비록 국가적 정체성은 다르겠지만, 스페인어라는 동질성으로 뭉친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은 공포에서 비롯된다고 반항의 시인 볼라뇨는 지적하지 않았던가. 벨라노와 그의 친구 울리세스 리마라는 문청을 통해 문학권력을 형성한 기존의 문학가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그것도 물론 ‘분더킨트’ 정도 되는 문학적 성과와 실력을 갖춘 볼라뇨나 되니까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나의 최애작가 볼라뇨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중요 인물 보르헤스를 다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자극한다. 그런데 정작 난 보르헤스를 제대로 읽은 적이 없노라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책쟁이들에게 고전 텍스트 같은 인물이 바로 보르헤스가 아니었던가. 어쨌든 <7인의 미치광이>의 로베르토 아를트, 아르헨티나 환상문학을 대표하는 <모렐의 발명>의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그리고 로드리고 프레산의 <켄싱턴 공원>의 유혹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일단 당장 구할 수 있는 책들부터 구해야지 싶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책들도 감당 못하는 마당에, 고수가 알려준 비급 앞에 주저하는 내 모습이 참 그렇다.
조금 민망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올 여름 작고한 서인도 제도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V.S. 나이폴이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성적 취향에 대한 비판도 눈길을 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도대체 뭘 보고 들었는지 나이폴은 페로디니스 장군은 슈퍼마초이고, 아르헨틴나 성적 관습에 대해 혹평일색이었다고 볼라뇨는 쓰고 있다. 딱 반 세기를 살고 지구별을 떠난 볼라뇨에게 시간이 좀 더 주어졌더라면, 그가 구상한 <소돔의 현자들>로 기가 막힌 소설을 하나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를 충족할 만큼 볼라뇨의 유고집이 완성도를 자랑하는 건 아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탈고, 편집과 같이 일반적 형태의 출판과정을 통해 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세상에 내보낸 작품들이 아니지 않은가. 미완의 상태로 있다가 어쩌면 강제로 세상의 빛을 본 작품들이니 말이다. 제임스 설터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대가의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가 좋을 순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세상을 떠난 천재작가의 에피타적인 작품들이라는 점에 나는 깊은 의의를 두고 싶다. 아무래도 볼라뇨 다시읽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