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저란트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김진혜.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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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동안 퍼붓던 비가 멈추고 이제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된 모양이다. 아침 출근길에 어찌나 덥던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어쨌든 여름이 왔고, 바야흐로 독서의 계절이 시작됐다. 지난달에는 좀 부진했었는데 이달에는 출발부터 산뜻하다. 마구잡이로 책을 읽어 대고 있으니까.

 

문제적 독일 작가 크라흐트의 <파저란트>를 3일 만에 읽었다. 1995년에 발표된 <파저란트>의 주인공 나는 쥘트 섬에서부터 여정을 시작해서, 그 망할 놈의 바버 재킷을 걸치고 함부르크, 뮌헨, 하이델베르크, 린다우와 스위스 취리히에 커버하는 숱한 곳을 여행한다. 그렇지 여행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술이었지. 알코올 중독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하고 엄청난 양의 술을 들이키면서.

 

소설 <파저란트>의 화자가 무슨 일을 하며 먹고 사는 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뭐랄까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풍류를 아는 한량이라고 해야 할까. 쓰임새와 스타일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돈깨나 있는 집안의 자식이 아닐까. 특정한 일자리에 매어 사는 사람이 주인공처럼 시간에 대한 제약 없이 독일 전역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게 가능할까. 게다가 가는 곳마다 알렉산더니 나이젤 그리고 롤로 같은 아는 사람들이 있어 잠자리 걱정할 필요도 없다. 쥘트 섬에서는 메르세데스 벤츠를 몰고 다니는 유사 여자친구 카린과 고티에에 대해 수다를 늘어놓는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기차를 잡아타고 함부르크로 떠나질 않나. 그야말로 보헤미안 라이프의 전형을 주인공은 제시한다. 물론 가는 곳마다 알코올이 빠지지 않는다. 그나마 양심이 있는지 약물은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는 잘 귀를 기울이지 않고 대신, 어린 시절 첫사랑 여자친구 집에 갔다가 지나친 환대에 그만 실수를 하고 내뺀 기억에서부터 시작해서 갖은 공상 속에서 주인공은 부유한다. 한 마디로 말해 도무지 이 세상에 속한 것 같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둥둥 떠다닌다고나 할까.

 

커피도 마시지 않고 신문도 읽지 않는단다. 대신 음악에는 좀 조예가 있는 듯 싶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모던 토킹에서부터 시작해서 클래시 등등. 그가 가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메룬의 야운데니 다카, 포트모르즈비 같은 지명은 또 어떤가. 그는 글로벌화된 패션세계의 진화처럼 다양한 소비재로 포위된 21세기 호모 컨슈머티쿠스의 전형처럼 다가온다. 지난 세기에는 내가 읽은 것이 나를 규정했다면, 이번 세기에는 내가 소비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규정해낼 수 있는 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하긴 그리고 보니 책도 일종의 소비재가 아니었던가.

 

카를스루에로 가는 기차간에서 만난 재수 없는 놈 때문에 느닷없이 하이델베르크에 내리는 충동적 경험도 마다하지 않는 주인공. 거기서 난생 처음 만난 오이겐 일행과 합류해서 자신을 환대해주는 그들에게 편안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자신을 동성애 대상으로 생각한 오이겐에게 질겁을 해서 당장 달아나기도 한다. 아, 그전에는 지하실에서 조우한 마약쟁이 나이젤의 주삿바늘 때문에 공포에 떨기도 했던가. 도대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 가는거지. 아무래도 데카당스한 것이 독일 통일 이후, 한 세대를 휩쓸었던 니힐리즘의 향기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당시 시대상에 대한 이해가 좀 더 필요한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프리드리히하펜으로 가는 길에 있다는 린다우인가 하는 곳에서 만난 막대한 유산상속자 롤로는 옴므 파탈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장을 잘 빼 입고 물 흘러가듯 유려하게 진행되는 파티에서 주인공은 역시나 파티원들과 융화되지 못한다. 그는 파티를 연 롤로 역시 마찬가지라고 정확하게 파악해 내기도 한다. 한 마디로 말해 파티원들이 사랑하는 것은 롤로가 가진 물질이지, 그가 가진 인품이나 성격 같은 캐릭터는 아니란 것이다. 피상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파티라는 모임이 주는 위선의 쇼라고나 할까. 아 뭐가 뭔지 도대체 모르겠다.

 

롤로의 포르쉐를 훔쳐서 타고 마지막으로 달아난 곳은 바로 취리히다. 주인공이 결국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 유일한 곳들은 바로 모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독일어권이 고작이란 말인가. 과연 주인공에게 ‘파저란트’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싶다. 토마스 만의 묘지를 찾겠다고 나선 그의 모습에서는 오래전에 갔던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에서 마리아 칼라스의 납골당을 찾아 헤매던 나의 모습에 연상됐다. 그리고 아마 헌화는 짐 모리슨에게 했었지. 바로 옆에서 발자크에게 헌화하던 미국 아줌마의 모습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다만 그런 좋은 기억 대신, 뜨거운 똥을 싸질러 대는 멍멍이가 자신의 용변 장소로 고른 곳이 어쩌면 토마스 만의 묘자리가 아닌가 하는 상상에 그만 빵 터져 버렸다. 크라흐트 이 친구, 유머감이 아주 없진 않구만 그래.

 

이제 내가 읽어야 하는 크라흐트 작가의 책은 <제국> 하나가 남았다. 출간 당시, 인종주의 문제가 이슈가 되었었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서구인들이 제3세계를 기술한 작품은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주인공의 여정을 소설에서 뒤쫓다 보니 문득 독일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에 다시 가게 되면 처음 못지않게 맥주를 마실 수 있으려나. 기본이 1,000CC라니 그건 좀 버겁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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