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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파라모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3
후안 룰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03년 12월
평점 :
달궁 독서모임이 이번 토요일로 다가왔다. 이달의 책인 후안 룰포의 <뻬드로 빠라모>는 진작에 도서관에서 빌렸지만 진도가 지지부진하다. 그래서 빌리는 순간부터 읽기 시작했지만, 결국 다시 읽게 됐다. 분량이 매우 적어서 금세 읽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고생길이 훤하게 열렸다.
우선 소설을 이끌어 가는 내레이터가 수시로 바뀐다. 첫 번째 화자인 후안 쁘레시아도가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 뻬드로 빠라모를 찾아가 복수를 하는 스토리라는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후안이 찾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고향 꼬말라의 메디나 루아에서 만나는 이들은 하나같이 죽은 사람들 뿐이다. 그러다 그도 소설의 어디선가 죽음을 맞이하고, 화자가 갑자기 후안에서 그의 아버지 뻬드로 빠라모로 순식간에 이동한다. 이럴 수가! 부랴부랴 위키피디아를 검색해 보니 친절하게도 타임라인이 다 나와 있을 정도다. 놀랍군, 남아메리카 주술적 리얼리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그런 순간이었다. 아니 후안이 처음에 꼬말라에 왔을 때부터 이미 죽었다는 가설도 상당히 그럴 싸하게 들렸다.
위대하신 돈 뻬드로가 유일하게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는 미겔의 죽음도 낯설지 않다. 메디나 루아는 이미 유령도시가 된 지 오래다. 돈 뻬드로는 변호사 불리는 마름 같은 대리인들을 이용해서 수탈을 계속한다. 유일하게 사랑한 수사나 산 후안의 죽음으로 삶의 의욕을 잃은 빠뜨론은 자신의 땅이 불모의 야노(평원)로 변해가는 걸 그저 바랄 볼 따름이다.
돈 뻬드로(뻬드로 빠라모)는 아버지 루까스의 뒤를 이어 메히코 농촌 지역 특히 토지 기반인 아시엔다를 중심으로 농민을 수탈하는 대지주의 모습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제조업이 발달하지 않은 제3세계 국가에서 토지는 자본의 집적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지 않은가. 토지를 바탕으로 생산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농민들은 자신의 노동을 팔아 간신히 먹고 살 수 있을 뿐이다. 상황이 이러니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게 아닐까. 돈 뻬드로가 판초 비야의 혁명군을 자처하는 비적들과 통 크게 흥정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최근에 본 영화 <코코>에서 나오듯, 망자들과 삶을 영위하는 메히코 사람들의 풍속이 우리와 너무 달라 좀 놀랐다. 우리는 망자들을 산 사람들의 세계와 분리하기 위해 으슥한 곳에 공동묘지, 지금은 납골당을 만들지 않은가. 망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하는 기괴한 장면 때문에 우리는 주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스타일을 떠올리지만 어쩌면 그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에 등장하는 종교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끝이 안 보이는 줄을 서서 기다리는 메히코 신자들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억울하게 죽은 형제의 복수와 신의 용서라는 종교적 신념 가운데 갈등하는데 렌떼리아 신부를 보라. 혁명으로 대변되는 민중의 분노가 끓어올랐을 때, 신부는 주저하지 않고 총을 잡고 나서지 않았던가. 입으로만 신의 사랑을 노래하는 사제가 아니라, 신이 위로하라고 명령한 민중을 위해 그리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무장한 예언자로 탈바꿈하는 모습이 염치도 없이 무자격 ‘종교사업자’로 변신한 어느 나라의 종교인들에 대한 힐난처럼 들리는 것은 나만의 상상이려나.
마지막으로 후안 룰포가 주목하는 지점은 바로 혁명이다. 우리의 삶을 바꾸기 위한 가장 빠르면서도 항구적인 방법은 바로 정치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민중은 결국 폭력을 동원하게 된다. 기득권층이 아무런 저항 없이 그들의 권력을 내준 적이 있었던가. 꼬말라의 대표적 기득권자 돈 뻬드로는 혁명이 그들의 삶에 미칠 영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혁명가입네 하는 비적들이 나타나 자금을 요청했을 때, 배포 큰 남자 돈 뻬드로는 그들이 원하는 금액의 두 배를 부른다. 그렇지 거래는 그렇게 하는 거지. 중국 역사상 가장 수완 좋은 장사치 여불위가 조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하고 있던 별 볼 일 없는 자초를 진나라의 왕위에 올린 케이스를 보라.
혁명이 모든 질서를 뒤엎을 거라는 착각은 하지 말자. 구질서를 몰아내면 권력을 쟁취한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돈 뻬드로는 미래권력이 될 지도 모르는 혁명군들과 척지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비록 아버지 루까스의 부와 권력을 물려 받았지만, 노회한 빠뜨론의 처신은 나무랄 데가 없다.
후안 룰포의 <뻬드로 빠라모>는 내가 느끼기에 확실히 매력적이면서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그런 작품이었다. 주술적 리얼리즘을 구사하는 장면은 마음에 들었지만, 다수의 화자가 등장해서 현실과 과거를 분주하게 오가는 장면에서는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있나 싶기도 했다. 어쨌든 잘 모르겠는 건 독서모임에 가서 물어 봐야지. 이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