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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는 유치원 다닐 때 부터 벌써 바깥 세상에 눈 떴다.
유치원 졸업을 할 쯤에는 이미 자신은 이 세상 이치를
훤히 안다고 자부했다.
집 안 가족들로 구성된 면면을 보며 그들의 속을 꿰둟어
보았고 집 안을 드나드는 친척이나 이웃,
또는 아빠를 만나러 오는 손님들도 나름대로의 인간성이나 용무 목적 등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항상 낮은 목소리와 소극적인 행동 반경 안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사는 엄마를 답답해 했으며 그래도 든든한 아빠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태산같이 믿음직하던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급기야 엄마는 밤도망처럼 고향을 떠난다는게 너무 어이없고 슬펐다.
이 기막힌 상황에서 아직 어린 자신이 무얼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결과
, 우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자신이 커서 어른이 되고 실력을 키워 놓는다면 이 불행한
현실을 해결할 수 있겠지.
차츰 자라나며 예나는 엄마의 연애를 바라보게 되었다.
예나가 볼 때 변선생님은 너무 쩨쩨하고 비겁해만 보이는 남자였다.엄마는 왜 그에게
사정없이 넘어가는 건가.그 원인을 생각해 볼 때, 엄마의 약점은 학력
콤프레스다.
공부를 가르쳐 준다는 바람에 그에게 빠져들었지 않은가.
가엾은 엄마를 위해서 예나가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자신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분별없고 나약한 엄마를 앞으로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껏 상심한 엄마가 동해 바닷가에서 그 찬바람을 맞으며
돌덩이처럼 굳어 먼 버다만을 응시하고 있을 때, 예나는 죽도록 추웠지만 불쌍한 엄마를 자신이 보호해
주어야만 한다는 또 하나의 새로운 결심으로 주먹을 꼭 쥐고 추위를 참은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온 뒤 예나의 역할은 정말 더 중요해졌다.
예나가 학교에 다니며 빠른 속도로 영어 소통의 실력을 키우는 동안 엄마는 식당에서 몇 가지 간단한 아침식사
메뉴를 배우며 미국 생활의 터전을 닦아갔다.
그리고 몇 년 후
,조그만 불렉퍼스트 식당을 차렸다.
학교 복도처럼 긴 공간에 한 편으로 길게 식탁과 의자를 배치한 아주 조그만 규모였다.
그러나 손님들은 주로 앉아서 느긋하게 식사를 하기 보다는 봉지에 넣어주는 음식 보따리를 손에 쥐고 총총 바쁘게 뛰쳐나가는
편이어서 좁은 장소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엄마가 영어가 너무 딸린다.
재료를 주문하거나 결재하는 일 ,글을 모르니 페이퍼 워크도 쉽지 않고 모두가 못
믿업다. 예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로 가게에 들러 매상을 첵크하고 재료 구입을 위해 마켓에 전화를 하며
또한 대금을 결재한다.
“ 어쩜 예나야,
너 없으면 이 무식한 엄마, 어쩔 뻔 했니 ? “
엄마는 찬탄과 경이의 눈으로 쑥쑥 자라 처녀 모습이 다된
딸을 바라 본다.
“ 엄마는 손이 커서 재료를
너무 많이 넣는거 알아 ? 좀 적당히 넣으세요 “
“ 아이구 우리 매니저님,
알아 모시겠구먼유, 하지만 햄이니 치즈가 두둑히 들어가니 우리 가게로 손님이 몰리는
거 아니것나 ? “
소규모의 장사지만 곧잘 되는 가게에서 벌은 돈으로 꿈
같은 집도 사게 되었다.
“ 예나야, 이제 나도 좀 이력이 붙어 나 혼자서도 이 가게 꾸려 갈 수 있거던. 일이야 종업원 한 사람
두고 하면 되고. 그러니 넌 이제 여기 손 끊고 학교 공부나 열심히 하그라.
예나는 집에서 가깝고 학비도 저렴한 커무니티 칼레지를
다니고 있다. 근데 여기는 이년제이고 학업을 계속하려면 사년제 대학으로
전학을 해야하는 단계이다. 그래서 엄마의 성화가 시작된 것이다.
“ 엄마야, 난 유명 대학 졸업장이나 변호사, 의사 직업 부럽지 않아요. 난 마켓팅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한 다음, 직접 유통업으로 뛰어들거얘요. 그 중에도 식자재 판매 쪽으로요 . 돈을 벌려면 장사가 최고란 걸 알았거던요.
“
예나는 이미 자신의 장래를 위한 계획을 세워 놓았기에
자신감이 넘쳤다.
예나가 조금 더 먼 거리에 있는주립대로 편입학했을 때
엄마는 특별히 새 차를 뽑아 주었다. 예나의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최고의
, 아가씨 차답게 산뜻한 빨간 색.
“ 엄마 나 이렇게 좋은 차
필요 없어요. 실용적이고 저렴한 일제 경차가 내게 어울려요”
“예나야 엄마는 네가 너무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살아 왔겠니 ? 이 차는 엄마의 마음이야.
조심해서 잘 타고 다녀”
엄마는 예나에게 여러가지 여유를 주었다.
시간도 재촉하지 않았고 용돈이 필요하면 쓰라고 카드도 만들어 주고 , 그리고 친구들과도
친하게 어울리며 남자친구도 사귀라고 부추겻다.
예나는 맘이 맞는 친구들과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카페에
들려 맛있는 것을 먹으며 영화나 음악, 인기있는 신간 책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혼자 먹어서 미안한 맛난 케익이나
또는 향기좋은 특제 커피를 사 가지고 왔다. 그리고 엄마에게 권하며 또 하루 중 일어난 재미난 얘기를 하나도 빠지지 않고 재잘대며 보고했다.
얘나의 수다에 같은 동갑내기 소녀가 되어 깔깔 웃는 엄마의
행복한 모습이 좋다.
예나의 빛나는 젊음의 나날이다.
이 년이 지난 후 예나는 대학을 졸업했다.
예나의 좋은 성적과 열성에 관심을 갖았던 답당교수는 예나에게 대학에 남아 석사 코스를 계속하라고 권했지만 예나는 애초의 계획대로 시내에 위치한 대형 식자재 유통회사에
취업했다.
23 살 , 예나에게 독립적이고 주관적이며 모든 가능성이 열린 신나는 세계가
열린 것이다. 이제 제법 새 직장에 익숙해지고 동료들과 친숙한 대화를 나누도록
몇 달이 지난
10 월 세째 목요일, 예나는 여느 때처럼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청바지에
코튼 흰불라우스 경쾌한 차림으로 출근하기 전 ,살짝 엄마의 방으로 스며든다. 엄마는 새벽 장사라벌써 일을 나가고 엄마의 익숙한 향기만 은은히 떠돈다.
< 오늘도 하늘 만큼,
땅 만큼 행복하세요.
엄마, 사랑해요
!! >
포스트잇에 굵은 펜으로 날렵하게 써서 화장대 거울에 부치고 다시
한 번 방을 휘 둘러보며
‘그 방을 나선다.
예나는 차에 올라 타고 안전밸트를 매며 집을 올려다 본다.
엄마와 내가 고르고 골라서 사고 정리하고 장식한 예쁜 집,
예나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차를 움직여 집을 떠난다.
다운타운에 있는 예나의 직장까지 연결해 주는 도로는
N 613 이다 왕복 8 차선의 넓은 도로는 논스톱 하이웨이로 모든 차들은 이 길로만
들어서면 미친듯이 속력을 낸다.
예나는 여느 때와 같이
FM 91사이클에 맞춘 클레식을 들으며 비교적 안전한 이차선으로 들어서 침착하게 악셀을 밟으며 운전대를 똑바로
잡고 운전해 갔다.
완전 모범운전의 전형적인 자세다.
그런데 이게 뭔가 알아차릴 새도 없이 거대한고 검은 물체가
포탄처럼 달려와 예나의 운전석을 강타한 것이다.
예나의 과실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
졸음 운전을 하던 트럭 운전자가 폭주를 하였다.그 트럭에 앞서 가던 차가 옆길로 빠지자 갑자기 60 M 전방에 예나의 차를 봤지만 그 자체 속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옆선으로 피하려는게 이미 예나 차의 운전석을 들이박게
되었다고 사건을 조사한 경찰이 말해 주었다.
그리고 예나의 죽음을 확인한 의사는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이므로
사망자는 미쳐 위험을 자각하지 못하고 그래서 죽음의 고통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고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예나의 죽음을 확인하고 장례식을 치르고 그리고 빈 집으로
돌아 온 연신은 도무지 현실을 분간할 능력을 잃었다. 날짜와 시간은 저대로 영원이고, 저녁 어두워질 무렵이면 밖을 내다 보며 예나의 깜찍한 빨간색
BMW 가 오기를 목을 빼고 기다린다. 긴 밤 텅빈 예나의 방에서 딸의 부재를
경험한 후에는 쓸개를 짜낸듯 쓴물로 가득한 위장 속을 세찬 구토로 비우며 세상과 삶을 저주한다.
빛나는 태양도 역겹고 푸른 하늘
,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들도 밉실맞다.
보이는 것 모두,
아름다운 것일수록, 먹어야하는 음식도 맛있는 것들일수록 더욱 원망스럽고 증오스럽다.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에서 소중하고 사랑스런
존재 예나가 없어졌는데도 어쩌면 세상은 모두 아무런 일 없었다는듯 감히 감히! 태평하단 말인가.
연신은 장사는 애저녁에 집어치고,
집안에 칩거하여 집 현관문을 잠그고 커튼을 내려
한없는 적막에 짓눌려 죽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음식을 끊은지도 며칠이나 지났는지 모른다.기력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정신 상태도 몽롱하여 자신이 자는지 깨있는지 분간이 안 된다.
몇 날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밤인지 낮인지 관심도 없다
‘ 귀신아, 날 잡으러 와라. 내가 너를 이렇게 간절하게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