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게도  동생 정연으로부터 항공우편이 왔다. 이민허가가 떨어졌으니  수속을 밟고 어서 오라는 내용이다. 수속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항공료도 예납해 두었으니 비자 발급이 완료되면 곧 오라는 것이다.

너무 반갑고 고마운 정연의 편지, 이건 지옥불 구덩이에서 파뿌리 한 줄기에 의해서 벗어나는 기분이다. 말도 통하지 않고 먹고 살 길도 막막한 이국에 가서 어찌 사냐하는 건 걱정도 아니다.

연신은 예나에게도 비밀로 하며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집 문제는 어떻게 하지 ? 한편 생각하면 애엄마에게 마안하다. 비록 유부남인 줄 모르고 변기섭과 사랑에 빠졌다  해도 애멈마아겐 변명거리도 안 된디. 아이들에게도 미안하다. 비록 본의는 아니었지만 아빠의 사랑이 걔들에게 함뿍 쏟아져야 하는데 그의 사랑을 내가 도둑질했다. 그 가족에게 사죄도 할겸  아빠와 함께 오롯이 살 수 있도록 집은 그대로 놔 두자.

 

연신아, 어떻게 그렇게나 냉정할 수 있는 거니 ?”

이민 수속을 하기 위해 퇴거신고를 한 것이 그 동직원 동료에 의해 알려진 모양이다.

그는 연신이 일하는 식당까지 찾아 왔다. 연신의 사정을 잘 아는 주인 아주머니가 밉살스런 눈총을 마구 쏘아대는데도 그는 끈질기게 연신만 쳐다본다.

연신은 그를 데리고 옆 다방으로 갔다.

변선생님, 그동안 감사했어요, 저를 가르쳐 주시고 또, --- 사랑해 주신 것도. 그러나 우리 여기까지가 끝이얘요. 알면서 짓는 죄는 저도 용납되지 않아요. 저를 선선하게 보내 주세요.

 

연신은 어둠이 짙은 밤, 간소한 짐을 꾸려 예나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변선생 가족을 만나서 이별의 인사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탐욕과 이기심, 악의로 가득 찬 이들에게 무슨 대화가 필요한가.

예나야, 우린 미국으로 가서 새롭게 시작하는거야. 엄마는 더 똑똑하고 씩씩해 질거야. 예나가 곁에 함께 있으니 난 용감한 엄마가 될꺼야.”

예나는 대답이 없다. 낮에 학교에서 반 친구들에게 이별의 인사를 한 것이 아직도 서운하고 슬픈  것일까,

예나야, 우리 미국 가서 살면 뜰이 넓은 집에서 꽃도 가꾸고 예쁘게 꾸미고 살자. 예나는 학교에 들어가 신기한 미국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또 공부 열심히 해서 어마어마하게 큰 대학도 다니고 멋진 사람으로 자랄거야. “

김포 공항 로비에서 밤을 지새운 연신 모녀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하는 마국행 비행기에 용감하게 몸을 실었다. 이 오욕으로 멍든 땅을 떠나 새로운 출발이다

알라스카 앵커러지 공항을 거쳐 뉴욕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 것은 13 시간울 거친 한낮이었다. 짐을 찾아 출구로 나오니 정연 부부가 마중 나와 있었다.

예나는 신기한듯 사방을 휘돌러 보다가 외삼촌과 인사도 변변히 하기 전인데

외삼촌 우리가 비행기 안에서 하루밤 잤는데 왜 여긴 아직 우리 한국서 출발한 날짜 그대루여요 ? “ 벽 정면에 대형 시계를 보며 묻는다 .

하 하 예나는 그것이 궁금하구나. 동서양의 위도에 따른 시차가 있어서 그렇단다. 한국이 약 14 시간 앞서 가지. 그런데 외숙모에게 인사해야지, 내 아내란다.”

연신도 처음 대하는 손아래 올케에게 반갑게 인사한다.

뉴저지 남부 프린스턴 지역에 사는 정연의 집은 지은지 얼마 안 된듯 산뜻하고 쾌적하다.

잘 손질된 넓은 잔디와 잘 꾸며진 꽃밭은 파스텔톤 물감을 뿌려 놓은 듯 화려하다.

정연의 처는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으며 정연은 로우스쿨에서 국제 변호사 자격을 따기 위해 아직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36 개월 쯤 되는 어린 사내아이가 있어 예나는 금방 그 아이와 어울려 데리고 논다. 예나는  어린 동생이 있다는게 엄청나게 기쁜 모양이다.

동생 부부는 무척 바빳다. 아침 일찍 각자 차를 타고 나가면 올케가 6 시 쯤 들어오고 정연은 좀 더 늦게 들어 온다. 로열자격 시험 날이 가까워져 도서관서 공부하고 오느라 늦는다 했다아이는 엄마가 출근하러 나가는 길에 데이케어에 맡기고 저녁에 퇴근하며 데려온다고 한다. 낮에는 메이드가 들러 4 시간 동안 청소, 빨래, 음식을 만들어 놓고 우렁각시처럼 사라진다고 한다.

올케, 내 있는 동안은 내가 집일 다하고 아기도 봐 줄께. 집 일은 걱정 뚝 끊고 너들 일이나 열심히 하그라. “

형님도 여기 정착하기 위해서 준비할게 많아요. 그걸 다 마스트하려면 바쁠거얘요  미국 2세대인 올케는 다행으로 한국 말을 대충 한다. 대학시절 여름 한 철이면 한국에 나와 한국어 학당에 다녔던 덕분이다.

한국 말 뿐이얘요 ? 거기서 정연씨도 만났잖아요 ? 일차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을 제가 유혹해서 미국으로 데리고 왔지요. 호 호하며 꾸밈없이 웃는다.

올케는 순수하고 상냥하다. 연신의 걱정스런 얼굴을 보며 위로하듯 말한다.

염려 마세요. 정연씨는 잘하고 있어요. 이 번 시험에서 꼭 붙으리라 믿어요

예나를 학교에 전학시키고 연신도 일주일에 두 번 운전 교습을 받았다. 기초 영어라도 익히기 위해 이민자들을 위한 교육기관 ESL에 등록하여 공부도 한다.

모든게 만족하고 희망적이다. 정연이도 올케의 낙관적 예측대로 무난히 합격했다.

자동차 라이센스를 획득한 연신이 중고차나마 하나 얻어 직접 운전하며 예나와 아기 리안을 학교와 데이케어로  라이드하며 미국 생활을 익혀 갔다.

 여름 날 뒤뜰 데크에서 구워 먹는 소고기나, 생선 바베큐의 맛이라니.

연신은 과거의 어두운 기억을 씻어내고 예나와 함께하는  새로운 가능성, 희망에 힘을 낸다.

 

어느 날 저녁 식사 후. 올케와 예나는 각자 방으로 올라가고 정연과 마주 앉았다.

내 커피 한 잔 내려줄까 ?”

아니, 누나 오늘은 누나와 와인 한 잔 하려구

와인 한 병과 잔 두 개를 내 온다.

누나가 정착할 기반을 더 마련해 줘야 하는데 미안하게 됐어.”

정연은 와인을 한 모금

. 사실 벌써 부터 계획이 있었는데 우리가 좀 늦춘거야. “

여기도 살기 좋구만 왜 그 먼 대로 가노 ? “

거기에 와이프나 내게 좋은 찬스가  있어 . 놓치기 아까운 기회야. 와이프의 친인척이 모여 살기 때문에 입지도 든든하고"하며 와인을 마신다. 무척 면목없는 얼굴이다.

왜 무슨 일인데 ? “

우리가 서부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가야 해.우리가 장차 더 큰 기대를 갖고 있어. “

더 큰 기대라고 ? “

뭐 안 될 것도 없지. 지방 판사나 국회의원이나, 난 자신 있다구 .”

과장하며 하하 웃는 정연 . 장하다 정연아, 네 꿈을 이루어야지

그런데 낸 우찌 살아야 하노 . 연신의 머릿 속은 또다시 복잡해 진다.

연신도 얼결에 와인을 한 모금 꼴깍 마신다.

동연 형이 한국서 인편에 돈을 보내 왔더만. 누나 살만한 발판을 만들어 주라고. 내 누나 이름으로 예금해 두었어. 뭘 할지 연구해 봐.”

갸가 농투성이 갸가 무신 돈이 있다고, ---- 얼마나 보냈대 ?”

적지 않은 돈이야. 5만 불 쯤 되더군. “

 

연신의 홀로살기 프로젝트는 여간 비장한게 아니다.

우선 불랙퍼스트 가게에 일자리를 찾았다. 새벽 6 시 부터 오픈하는 이 곳서는 즉석에서 간단히 만들 수 있는 샌드위치나 핫도그, 볶은 소고기나 닭고기를 치즈와 함께 바켓빵 가운데 끼워 넣은 치즈 스테이크, 그리고 커피 쥬스 등의 다양한 음료를 파는 가게이다. 이 가게를 선택한 것은 새벽 일찍 일을 시작하지만 불랙퍼스트 , 브런치( 중간참 ) 런치까지 만 써빙하고 장사를 끝내 두 세 시 쯤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오후 시간을 예나와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생기는 것이 맘에 든다.

과정이 간단하고 시설이 좋아 일에 곧 익숙해지며 연신은 이에 재미마져 났다.

거처는 예나 학교 근처의 아파트로 옮겼다. 주변 경관이 깔끔하고 살림에 필요한 모든 가구들이 구비되어 있어 당장 들어가 사는데 불편함이 없다.

인근 교회에도 이름을 올리며 이제보다 더욱 신앙생활에 집중하려 맘 먹는다.

연신의 미국살이는 연착륙으로  순조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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