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신은 맥없이 짐을 쌋다.
당장에 입을 옷가지와 돈을 챙겻다.
예나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손을 잡고 집을 나왔다.
집은 돌아보고 싶지도 않고 미련도 없다. 내가 선택하고 믿었던 사랑
, 여기까지인가 ?
이제 가을이 깊어가고 겨울을 예고하는 싸늘한 바람이다.
낙엽들이 바람따라 이리저리 뒹군다. 일, 공부,
그보다 변선생과의 뜨거운 사랑으로 계절을 잊었었다.
“ 엄마, 어디 갈려구 ? “
“ 오랜만에 엄마 고향 가 볼려구
“
강남 터미널에 나가 상주행 버스표를 사고
, 버스에 오르기 전 오래 된 수첩을 찾아 동생 동연의 집에 전화를 한다. 마침
동연이 전화를 받는다.
“ 웬일이고 ?
누이 무신 일 있나 ?”
“ 아이다. 그냥 고향이 가고잡아 나왔다. 내 저녁 8 시 쯤 상주
버스터미널에 내릴테니 네가 쫌 나온나. 오랜만이라 내 통 지리를 모린다 아이가? “
‘” 누이가 여길 오겠다고요
? 지금 때가 좋지 않은데 “ 뒷소리는 우물우물하며 당황해 한다.
“ 왜 무신 일인데 그라노
? 내 네 집에 신세짓는게 싫나 ? “ 연신의 목소리가 날카로워 진다.
“ 아이, 됏심더 .내 시간 맞추어 터미널에 나갈끼고만 . 그 때
보입시다. “
몇 년만에 만난 동연은 몸집도 크고 중후한 모습이 나이보다 노숙해 보인다.
‘ 장가를 일찍 가서 벌써 두
아이의 아범이 되더니 꽤 으젓하구만’
연신은 몇 시간 전의 노여움은 사라지고 장성한 동생을
흐믓하게 바라 본다.
“ 누님 오시느라 고생하싰구만요.
아이구 예나도 많이 컷네. 예나 배 고프지 않나 ? 외삼촌이 밥부터 살꾸로. “
모녀를 이끌고 큰 한정식 집으로 향한다.
“ 네 처와 아들은 다 잘 있고
? “ 연신도 인사를 차린다.
“ 우리사 머 잘 있습니다.
내년 봄이면 한 식구 더 늘어예 “
“ 그러나 ? 잘됐다. 축하한다. 그라모 머 더 바랄게 있을라고 “
연신도 기분이 좋아진다.
입에서 살살 녹게 맛있는 불고기와 뜨끈한 만두국으로 배를
채운 모녀가 일어설 채비를 하는데 동연이 목소리를 낮추어 연신에게 말한다.
“ 지금 누이,
읍내나 고향 마을에 가서 사람 눈에 띄는거 좋지 않습니다.오늘은 여기 가까운 여관에서
하룻 밤 유하시고 낼은 어서 떠나는기 좋을끼요 “
연신의 의문과 노여움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느낀 동연이 얼른 이어 말한다.
“자세한 말은 자리를 옮긴 담에
하입시다 “ 무겁고 신중하게 말한다.
“ 여긴 지금 소문으로 말이
많십니다. 아마 이 지방 신문에도 한 분 낫을끼요.”
“ 무슨 소문
? “ 연신이 궁금하고 답답해서 묻는다.
“ 우리 죽은 어메귀신이 매형을
잡아가는 바람에 매형이 그렇게 급살을 하싯다네요 “
“ 뭐라 ? 그기 먼 말인교 ?”
“ 사실 매형 돌아가실 때부터 그런 소문이 있었십니다 마는
근거 없는 헛소리로 웃어 넘겼지러.”
말을 끊고 잠시 누나를 본다.
숱 검은 눈섭으로 미간을 좁혀 걱정스런 표정이다.
“ 이제 삼 년이나 지냈시니께
잊혀질 만도 하구만, 사실 한 달포 전에 어메 살인범이
잡혔어요.
다른 사건으로 걸렸는데 취조를 하다 보니 매형 사건도 실토를 했더만이라. 그 눔
입에서 이만석이 어메를 죽이삐라고 사주를 했다카데. “
다시 누나 연신을 지긋이 바라 본다. ‘ 니는 뭐 좀 아는기 없노?’ 하듯이.
“ 와, 와, 예나아빠가 어메를 와 ? “ 목소리가 높아지려는
연신에게 동연은 곤히 자고 있는 예나를 눈짓하며 입술에 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둘이는 다시 목소리가 작아진다.
“ 그 눔 말에 매형이 어메
미쳐 떠돌던 때 몇 분 만났다카데. “
“ 아마 엄마를 타일러 집으로
보낼락 한게 아니것나 ?”
연신이 짐작으로 부드럽게 말한다.
“ 아이라, 어메가 남자만 보면 이만석, 이만석 하고 쫒아갔던기라. 그라이 읍내에 ‘ 도대체 만석이가 누군데 그에 미쳤노 하고 쓱덕였다네. 읍내서 꽤 유지로 알려진 매형이 똑같은 이름에 엄청시레 맴이 불편했겠지. 더구나 사위 장모
간 아인가“
“ 그래서 와,
와, 죽이기까정, 너도 그 눔 말을 믿나
? 매형이 이미 저세상 사람이라고 덮어 씌우는가 ? 매형은 그럴 사람이 절대 아이다.
“ 연신이 힘 주어 말한다.
“ 내도 누나처럼 믿고 싶지,
그란데 이상한 건 매형의 형님이란 작자가 비록 죽은
동상이지만 동생을 위해 아무 변호가 없는기라.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지만 이렇게 추접고 무서운 살인 사건에
연루된 동생을 위해 오직 난 모르쇠하는거야. 우와, 동생 재산 독차지해
부자가 됐으면서 어쩌면 그리도 인정머리가 없노 ? “
동연은 정말 속 터지고 열 받아 주전자 물을 컵에 따라
벌컥벌컥 마신다.
“ 그라고 누나 왜 고향 동네
가지 말라고 하냐면, “ 동연은 눈을 감고 침을 삼킨다.
“ 모두들 누나를 욕하고 미워
해. 누나 보면 죽일락 할게다
‘와, 와 ! 그카는데 ? “
“ 어메 남자를 딸이 가로챘다고,
“ 동연은 한숨처럼 내뱉는다.
“ 택도 읎는 소리 마라.
동연아 이 무슨 해괴한 소리야 ?” 연신이 비명을 지른다.
동연은 또 예나를 가리키며 입에 손가락을 댄다.
“ 누나 누나,
나도 알지. 누나의 배꽃 같이 순백한 마음을 정연이하구 내는 알지.“ 동연의 목소리에 흐느낌이 가득차며 연신도 가슴이 먹먹하다.
“ 근데 누나야,
그 시댁네, 시아주버니라는 작자가 ,매형의
형이라는 눔과 그마누라가 그렇게 해괴한 이야기를 엮어 동네에 소문을 퍼뜨리는거야. 사람들은 또 그런 얘기를
좋아라, 입방아를 찧어대고, 누나 나도 여기서 사는거 괴롭다.
당장에 여기 뜨고싶지만 장인어른이 이 고장서 한 발도 못 움직인다카는데 데릴사위 내가 별 수 있노 ? 숨 죽이고 살 뿐이제.”
“ 왜 니도 전답을 솔찮게 가지고
갔구만 기 좀 피고 살그라. “ 연신의 응원에 동연이 서글프게 웃는다.
“ 그기 누나가 이만석씨에게
시집 가며 댓가로 받은 기 아니가 ? 그거 생각하면 내 피눈물 난다. 어찌 자랑스럽것노 ?”
밤이 이슥하도록 밀리고 막힌 이야기를 하다 동연이 집으로
가겠다고 일어선다.
한없이 서운한 연신의 맘이지만 붙잡지는 못한다.
그 서운한 마음을 알아 챈 동연이 말한다.
“ 누나야, 여긴 잊어라. 모두 잊고 멀리 가그라. 손가락질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곳으로 떠나그라. “ 동연은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잠긴다.
“ 내 정연에게 말해 놨다.
누나 미국으로 델꼬 가라구, 아마 수속하고 있을끼구만. 연락 오면 퍼뜩 떠나그라. “
동연이 떠난 후
, 연신은 쑤세미처럼 뒤엉킨 머리 속을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 엄마가 이만석씨 때문에 미치다니,
그 엄마를 이만석씨가 사람을 시켜 죽이다니, 아니 절대 그럴 이가 없다 그이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 연신은 세게 머리를 흔든다 머리 속은 더 엉망진창이다. 꼬리를 무는 해괴한 이야기들의 중심에는 연신 자신이 거기 있다. 아, 이번엔 연신이 미칠 것같은 혼란의 극치가 된다.
밤을 꼬박 지새운 연신은 예나에게 아침 밥을 사 먹이고
터미날로 나가 속초행 버스표를 끊었다.
“ 예나야 바다 보러 가자.
엄마도 처음 보는 바다지만 아마 너도 보면 좋아할걸 “
예나는 불안하다.
그 낮선 사람들이 우리 집에 쳐들어온 후 엄마는 이상해졌다.생전 돌아보지 않던 고향을
다 찾고 고향 마을을 자세히 돌아 보지도 않은 채 인젠 또 왠 바다인가. 엄마가 많이 심난하고 괴롭고 힘든
모양이다. 엄마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정작 할 말은 꾹 참는다.
엄마는 군것질거리를 한 봉지 사 들고 예나 심심하면 보라고
만화책도 몇 권 샀다.
바다는 정말 엄청나다.
넓고 시퍼렇고 또 파도소리, 새소리로 시끄럽다. 바다와 모래벌판을 휩쓸고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차가워 금방 손발이 오그러든다.
“ 엄마 춥다 “
민박 집의 따뜻한 방을 생각하며 엄마를 본다.
엄마는 찬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지 돌비석처럼 서 았다.
무척 슬퍼 보여 또 할 말을 꾹 참는다.
연신은 대입 검정고시 공부할 때 달달 외었던 시를 생각한다.
<겨울바다에 가 보았지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 >
이제 많이 잊어 버렸지만 띄엄띄엄 기억 찾아 마음 속에 읊어 본다.
악의와 이기심,
치욕만이 가득한 저 바깥세상에 나가고 싶지 않다 .그냥 잠 들었으면
. 며칠 연신의 맘 속에 우뚝 불거진 고집이다. 그런데 아직 어린 내 딸 예나,
예나를 하며 연신은 깜짝 놀란다. 예나는 새파랗게 얼어 부들부들 떨고 있다.
“ 아유! 미안해 엄마가 미쳐 몰랐네. 어서 집에 가자. “ 연신이
예나를 감싸안으며 걸음을 옮긴다. 예나의 반가운 음성이 들린다.
“ 그럼, 엄마 오늘 당장 집에 가는거예요 ?” 연신은 민박집으로 향하며 딸에게 묻는다.
“ 예나는 빨리 집에 가고 싶어
?”
“ 그럼, 엄마 벌써 5 일째나 결석해서 선생님이랑 친구들이 걱정해요. 나도 빨리 학교 가고 싶구요 “ 예나는 뜸을 들여 망설이듯 엄마 눈치를 보며 말한다.
“ 그리구, 그 사람들이 우리 집 몸땅 차지하고 살까봐 걱정돼요 “
“ 하 하 ! 아무려면 주인 있는 내 집을 함부로 뺏을까봐 ? 예나 걱정꾸러기네.”